해어지다 헤어지다
여름밤 잠자리가 좀 시원 하라고 삼베 침대보를 내어 침대에 깔았다. 아내가 베를 뜨다가 침대 너비에 맞게 잘라 가장자리를 박음질하여 만든 것이다. 몇 해를 여름만 되면 깔고 자면서 뒤척이고 비비대고 하다 보니 가운데 자리가 떨어져 해어졌다.
색깔 맞는 실을 골라 꿰매어 보기도 하지만, 낡기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웃 자리가 또 해어진다. 아내가 있다면 어떻게 손보아 해어지지 않게 깁거나 다시 천을 뜨다가 새로 마련해 주겠지만, 그렇게 해줄 아내와 떨어져 헤어졌다. 다시 못 돌아올 세상으로 가버렸다.
어떤 물건이라도 오랜 시간을 두고 많이 쓰다 보면 낡고 해어지지 않는 게 있을까만, 사람 살이도 그러하지 않으랴. 누구라도 만나서 오래 함께 지내다 보면 마음과 몸이 해어질 수도 있고, 헤어질 날도 오기 마련이다.
‘해어지다’와 ‘헤어지다’는 유사어일 것 같다. 물론 중세 국어에서 보면 ‘해어지다’는 ‘닳다’, ‘해어지다’는 뜻의 동사 '해다'로, ‘헤어지다’는 ‘흩어지다’, '갈라지다'는 뜻을 가진 '헤디다'로 서로 다른 태생을 두고 있지만, 변천 과정을 거치면서 비슷한 어형이 되었다.
'해어지다'는 단형 동사 '해다'의 어간 '해-'에 피동 어미 '-어지다'가 결합한 형태로 발전했고, ‘헤어지다’는 '헤디다'가 구개음화를 거쳐 '헤지다'가 되어, 여기에 '-어지다' 형태가 더해져 최종적으로 '헤어지다'로 정착했다.
이 두 말은 다 같이 ‘떨어지다’라는 말을 데리고 다닐 수 있다. ‘떨어져 해어지다.’라는 말도 있고 ‘떨어져 헤어지다.’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떨어지면 해어지는 것이고, 서로 떨어지니까 헤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떨어지다’는 ‘해어지다’와 헤어지다‘를 넘나들면서 둘의 손을 잡아 주고 있다. ‘떨어지다’라는 말 속에는 ‘옷이나 신발 따위가 해어져서 못 쓰게 되다.’라는 뜻도 있고,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다.’라는 뜻이 있는 걸 봐도 그렇다.
’떨어지다‘가 두 말을 이어주기 때문인지 두 말은 생사를 같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해어진 것은 붙이거나 꿰매면 다시 전처럼 쓸 수도 있고, 헤어진 사람들도 마음을 돌려 다시 만나 옛정을 새 정으로 새길 수도 있다.
물론, 해어지기를 거듭하다 보면 영영 못 쓰게 되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이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이마저도 ’해어지다‘와 ’헤어지다‘가 서로 비슷한 성격을 가진 말라는 걸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어지는 것은 사물의 일일 수 있고, 헤어지는 것은 사람의 일일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정도 사랑도 시간이 흐르다 보면 그 정이 해어질 수 있고, 뚜껑과 그릇이며 암나사와 수나사는 서로 헤어질 수 있다.
해어지지 않게 하거나 오래 쓸 수 있게 하려면 아껴서 소중하게 써야 할 것이고, 헤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같이할 수 있으려면 서로 아껴주고 소중하게 여겨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할 때 사물이든 사람이든 오래도록 내 곁에 머물 수 있을 것이다.
그리 보면 내 주변에 해어지고 해어지는 일이 생겨나곤 하는 것은 내가 아껴 쓰지 못하고 소중하게 보듬어 주지 못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좀 더 살뜰히 보살펴주지 못하고, 좀 더 따뜻한 사랑을 주지 못한 게 부질없는 아쉬움으로 남기도 한다.
그 아쉬움을 어루만지면서 돌아보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을까 하는 상념이 인다. 언젠가는 모두 해어질 것들이고 헤어질 사람들이 아닌가. 다만 그 시간이 조금 빨리 다가온 것이 아리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 빠른 시간이란 것도 내 상념 속의 것일 뿐이다.
불가의 언설을 빌리면 세상 모든 것은 지. 수, 화, 풍 물질 요소 네 가지와 공空 견見 식識 정신 요소 세 가지로, 잠시 화합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거듭한다고 하여 영원한 본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해어지고 헤어지는 것들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간 그 바닥에 가면 서로 만나 하나가 되어 뜻의 구별이 소용없어지게 될 수도 있다. 그 구별이 없어지면 이 두 말은 두 소리에 한뜻을 가진 이음 동의어가 될 것이다.
지금도 내 주변의 사물들이며 사람들은 해어지고 헤어져 그 한뜻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어찌 내 주변의 것들만이랴, 내 몸도 마음도 해어지고 헤어져 가서, 해어진 몸이며 헤어진 마음이 하나가 될 때가 올 것이다.
나는 지금 난병과 함께 살고 있다. 그 병이 내 몸을 해어지게 하고 있다. 좀 천천히 해어지게 해보려 하고는 있지만, 그 해어지기는 언젠가는 세상의 모든 것과 헤어지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둘은 동의어가 되어 만날 것이다. 나는 지금 그 동의어를 향해 가고 있다.
그 동의어의 세상에는 해어질 일도 없고, 헤어질 사연도 없고, 그 말도 없다. 그 세상을 향해 나는 설지 않은 걸음으로 걸어간다. 언제 다가와도 낯설지 않을 그곳을 향해 뚜벅뚜벅 가고 있다.♣(2026.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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