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산이 아늑한 까닭은

이청산 2018. 3. 25. 22:41

산이 아늑한 까닭은

 

산에 봄이 오고 있다오는 봄을 가장 빨리 맞는 곳이 산일지도 모른다산을 오르다가 솔빛이 어제와는 달리 새뜻하다 싶으면 봄이 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봄을 이루는 것이라는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봄은 역시 꽃으로 오는 것이다.

산의 봄소식을 맨 먼저 전해주는 것은 생강나무 노란 꽃이다차가운 눈바람이 아직 가시지 않은 숲속에 가느다란 생강나무 가지가 눈을 틔우다가 보송한 솜털 같은 노란 꽃을 피워내면 말할 나위 없이 봄이 온 것이다이어서 반짝이는 샛별 같은 올괴불나무 조그만 꽃이 앙증맞게 피어나고 진달래가 꽃망울을 맺기 시작하면 바야흐로 봄은 익어간다.

이제 산에는 진달래며 철쭉이 피고벚꽃이며 매화말발도리가 만발할 것이다가지가 새로 뻗고 잎은 짙은 녹음을 이루며 무성해질 것이다청량한 그늘을 지으며 넉넉한 가슴을 열어젖힐 것이다그늘을 지우던 잎은 내려앉아 산의 따뜻한 자양이 되어 새로운 생명들을 예비할 것이다다시 꽃으로 잎으로 피어날 것이다.

꽃과 잎이 어우러지는 산이 아늑하다마치 어머니의 가슴처럼 포근하고사랑하는 이의 품처럼 따듯하다그 포근하고 따듯함에 취하여 산을 오르다 보면 산의 맑은 숨소리와 함께 아늑한 기운이 온몸으로 젖어든다산의 아늑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어여쁜 꽃에서 오는 것일까푸른 잎새들이 뿜는 것일까부드러운 흙이 풍겨내는 것일까.

화사하고 해사하게 피어나는 산꽃들은 마음을 달게 하고 설레게도 하지만 이내 고즈넉한 그리움에 젖어들게 한다연록에서 짙은 초록에 이르기까지 잎새들의 푸른빛이 주는 청량감은 모든 고단을 다 잊게 한다산에 깃드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 되고 있는 흙이 콘크리트처럼 경결하다면 그것들이 어떻게 안길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산을 들면 어찌 아늑하지 않겠는가이 아늑함은 저 꽃이며 나무를 보면서 느끼는 내 감정의 충일감일 뿐일까아니면 저들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어떤 에너지 같은 것이 있어서 그로 인해 내 감정이 동화되는 것일까비감에 젖거나 분노로 속을 끓일 때 산을 오르다 보면 그 어지러운 속이 가라앉게 되는 것은 무엇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법정 스님은 피터 톰킨스와 크리스토퍼가 펴낸 식물의 정신세계를 들어 그 까닭을 전하고 있다그 책을 보면 식물도 우리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슬퍼한다는 것이다식물은 단순히 살아 숨 쉴 뿐만 아니라 영혼과 개성을 지닌 생명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 연구를 통하여 밝히고 있다고 한다.

예쁘다는 말을 들은 난초는 더욱 아름답게 자라고볼품이 없다는 말을 들은 장미는 자학하다가 시들어버린다는 것이다그렇다면 희로애락으로 감정의 기복을 겪기는 사람이나 식물이나 진배없지 않은가그런데 어찌하여 사람 세상과는 달리 산에 들면 아늑해지고 꽃과 나무를 보면 편안해지는 것일까.

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주장한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며 심리학자인 페히너(Gustav Theoder Fechner 1801-1887)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간들이 어둠 속에서 목소리로 서로를 분간 하듯이 꽃들은 향기로써 서로를 분간하며 대화한다꽃들은 인간들보다 훨씬 우아한 방법으로 서로를 확인한다사실 인간의 말이나 숨결은 사랑하는 연인들 끼리를 제외하고는 꽃만큼 미묘한 감정과 좋은 향기를 풍기지 않는다.”

우리가 산에서 꽃과 나무를 보며 아늑함을 얻는 것은 바로 그 꽃과 나무들이 주고받는 우아한 방법에 있는 것은 아닐까그들은 인간처럼 서로 미워하며 다투지 않는다욕설을 주고받으며 싸우지도 않는다남을 시기하며 욕심내지도 않는다서로 권력을 차지하겠다고 쟁투를 벌이지도 않는다그저 향기로 말할 뿐이다은근한 마음으로 손인 양 가지를 뻗어 서로 보듬고 어루만질 뿐이다.

그 우아한 방법의 사랑을 두고 시인은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아아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정희성, ‘그리운 나무’)라고 했다.

그리워도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 나무뿐일까사람인들 그립다고 다 다가설 수가 있는가나무는 애틋해할지언정 달뜨지 않는다열정이 깊을수록 빛깔 고운 꽃을 피우고 짙은 향기를 뿜을 뿐이다그래도 그리우면 벌 나비를 불러 그 마음을 전하고 부는 바람에 향기를 실어 보낼 뿐이다.그 은근한 그리움의 기운이 산을 아늑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그 아늑한 기운이 산을 드는 사람의 마음을 정밀(靜謐)에 들게 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산을 오른다그 꽃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피고그 나무는 늘 그 자리에 서있다바람이 불면 향기를 날리고 가지를 흔들 뿐이다그 여일한 모습이 아늑하다그 모습을 은근한 그리움으로 빚어내는 산의 정령(精靈)이 고즈넉하다그 정령의 품에 안긴다미움도 다툼도세상의 모든 티끌이 다 가시어진다.

그 정밀한 정령 속으로 든다산은 아늑하다.(2018.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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