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손녀가 태어나다

이청산 2006. 10. 26. 14:46

손녀가 태어나다



꽃이 피네, 한 잎 두 잎. /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이호우 : '개화'

 

손녀가 태어났다. 아들이 결혼한 지 삼 년만이다. 제 아비가 시시로 사진을 찍어 보낸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모습이며, 배시시 눈을 떠서 생애 최초로 보는 세상을 살피는 모습도 보내온다. 어미 태중으로부터 새 세상에 나오느라 힘도 들었을 것이고 놀라움도 클 터인데, 아가의 얼굴은 참으로 평화스럽다. 아침 햇살에 함초로히 피어난 한 송이의 꽃과도 같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둥근 달 같기도 하다. 말끔한 살결이며 구김 하나 지지 않은 얼굴에는 세상의 모든 사랑과 순수가 다 모여 있는 것 같다. 입술을 살포시 열고 작은 웃음을 띄우는 저 모습. 신기하기도 해라, 미소짓는 법을 어떻게 알았을까. 배냇짓이기야 하겠지만 영락없이 예쁘고도 귀여운 미소다. 얼른 달려가서 포근히 안아 주고 싶다.
 

아가를 처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태어난 지 열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여태껏 달려와 보지 않는 할아비, 할미의 무심을 얼마나 탓했으랴. 아가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 제 아비의 고모부가 별세했다. 나에게는 누님의 일이라 당연히 상고의 아픔을 위로해야 할 처지였다. 문상 뒤에 새 사람을 대하려면 초칠일은 지나고 보는 것이 좋으리라고 주위에서 권유했다. 무엇이 어떠랴 하고 못들은 척 할 수도 있는 일이련만, 안 들었으면 모르되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마음이 켕겼다. 그도 또한 옛사람들의 삶의 지혜라 할 수 있을 터이거늘, 좋은 게 좋다 싶어 제 아비, 어미에게 그 사정을 말하고 아가와의 대면은 초칠일이 지난 이후로 미루었다. 그 '미룸'은 아가가 탈 없이 튼튼하고 슬기롭게 잘 자라기를 비는 할아비, 할미의 간절한 기도이기도 했다.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왕 늦은 일이라 공무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주말을 택해 제 할미와 서울행 차를 탔다.
 

아가가 태어나기 전 날 제 할미는 전화통 앞에 앉아 밤을 하얗게 세웠다. 산고로 말하면야 제 어미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그동안 아가는 제 어미의 뱃속에서 탈 없이 잘 자라고 있다고 했다. 가끔 병원을 찾아보면 하나하나 모습을 갖추어가며 아주 튼실하게 자라나고 있다고 한다며, 임지 따라 산촌 벽지에서 고적하게 살아가고 있는 늙은이들에게 그 즐거운 소식을 전해 주곤 했다. 두 늙은이는 어떻게 생긴 놈이 또 하나 이 세상 하늘을 이게 될까. 누구를 닮은 놈일까, 누굴 닮아도 좋아 우리 집안에 못생긴 사람은 없잖아, 하하! 실없기는! 하며 콧등을 찡긋 세우는 아내를 보며 다시 한번 웃는다. 출산 예정일이 하루, 이틀 지나갔다. 이제나저제나 소식이 올까, 전화통을 향해 귀를 곤두세우고 있는데, 예정일이 사흘 지난 날 낮에 갑자기 산기가 느껴져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 날 낮이 지나고 밤도 지나고 다음날 새벽까지 진통이 계속되었다. 며느리는 한 하늘을 열기 위한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의 진통을 겪는 모양이다. 삼 년 동안을 공들인 것이라 산모는 물론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조바심도 크고 기대도 컸다.
 

드디어! 아가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렸다는 전화를 받은 것은 아침 8시가 되어 갈 무렵. 정확히 7시40분에 아가는 새로운 하늘이 되어 이 세상으로 왔다고 했다. 이놈이 하도 튼튼하다 보니 그만큼 어미의 산고도 컸던 모양이다. 큰일이 이루어지자면 고통도 큰 법이 아닌가. 어미의 그 지난한 산고 속을 뚫고 태어난 놈이니, 또 번듯한 이목구비와 튼실한 몸으로 새 세상 정기를 받은 놈이니 나중에 필시 큰일을 할 수 있으리라. 다행히 산모도 건강에 큰 이상 없이 모든 산후통이 잘 다스려지고 있다고 했다. 두 늙은이는 모처럼 손을 맞잡고 쾌재를 부르며 희열에 젖었다. 호사다마라고 좋아도 너무 좋은 척하지 말아요. 잘 생겼다고 자랑도 말아요. 귀한 놈일수록 일부러 천한 이름 붙여 부른다잖아요. 아내가 신신당부한다. 그래, 남한테까지야 말 안 해도, 좋은 일은 좋은 일이잖아. 글쎄 그리하지 마시라니까. 아내는 기쁨도 즐거움도 속으로만 꼭꼭 챙겨 넣는다. 그리고 눈을 감고 손을 모은다. 며느리가 산후의 일을 수습하여 정신을 차릴 즈음, "예쁜 공주 낳아 주어 고맙다. 애 많이 썼다."라고 적은 카드를 넣어 예쁜 꽃 담뿍 담은 꽃바구니 하나 보내 달라고 우체국에 부탁했다.
 

초칠일이 지난 첫 토요일, 떡도 찌고 찬거리도 장만하여 서울로 달려갔다. 아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한 열흘 넘게 지났으니 태어날 때보다는 많이 달라져 있겠지. 젖 잘 먹고, 잘 자고 있을까. 즐거운 상상에 젖으며 서울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아들을 따라 며느리가 산후를 의탁하고 있는 조리원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방에서 쏟아져 나온 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소독하는 장치라고 했다. 며느리가 해맑은 미소로 맞는다. 그래, 힘들었지? 며느리의 손을 잡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가는 포대기에 싸여 유리벽 안의 유리 바구니에 누워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아가의 모습은 유리벽 너머로 볼 수 있을 뿐이다. 덥석 안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아가를 보호하기 위한 일이거늘 마다할 수 없는 일이다. 저리하지 않으면 세상의 찌든 기운이 아무런 저항력이 없는 저 여린 것에게 무슨 해를 끼칠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하면 조리원의 세심한 배려가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아가가 잠들어 있는 모습은 아들이 부지런히 보내주던 사진에서 보던 꼭 그 모습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과 평화가 다 깃들어 있는 듯한 모습-. 하기사 저 아가가 세상의 어지럽고 거친 일을 어찌 알랴. 세상은 지금 신문 펼치기가 두렵고, 뉴스 듣기가 겁날 정도로 험하고 혼란스럽다. 사람이 사람을 속이고 해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사회와 나라의 지도자들이 할 노릇 제대로 못해 백성 되어 사는 일이 어렵기만 하다. 세상에는 아이들이 따라 배울 만한 게 많지 않다. 철이 들어갈수록 배워 익힐 만한 게 더욱 드물다. 겪지 않아야 할 것을 겪고, 익히지 말아야 할 것을 익혀 외틀어지고 비틀어진 채 살아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가는 티끌 하나 없는 백지에 순수와 사랑과 평화만을 오롯하게 담아 이 세상에 왔다. 그것을 온전하게 키워주고 지켜주는 것은 먼저 난 사람들의 몫이고, 사회와 나라가 해야 할 일이다. 저의 부모가 된 제 아비어미, 할아비할미는 물론이요, 저 아가가 삶의 적을 두게 될 사회와 나라가 책임져야 할 업이다. 과연 그리할 수 있을까. 그렇게 키워주고 지켜줄 수 있을까.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걱정을 지울 수 없고 불안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누구를 향해 이 불안 거두어주기를 바랄 수 있으랴. 제 아비어미, 할아비할미부터 밝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질 일이다. 남에게 피해 끼치는 일 없이 하기를 애쓸 일이다. 우주의 기운은 자력과 같아서 밝은 마음을 지니고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춘다고 하지 않는가. 희망과 행복은 지키려는 사람에게만 지켜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 살다 보면 저 아가가 철들 무렵엔 지금보다는 훨씬 밝은 세상, 맑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지. 내 손녀와  모든 어린 싹들은 밝고, 맑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도 되는 세상이 오겠지.
 

손녀와의 첫 대면을 마치고, 내 삶의 터 산간 벽지 고적한 마을로 가는 차를 탄다. 이제 고 귀여운 놈 생각만으로도 고적의 한 부분은 싹둑 잘라낼 수 있을 것 같다. 제 할미는 어미가 조리원에서 나올 삼칠 날을 손꼽는다. 미역국 걸쭉하게 끓여놓고 튼실하고 예쁜 손녀를 점지해준 삼신할미께 감사의 축수를 드릴 것이라 한다.♣(2006.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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