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아버지의 꽃씨

이청산 2006. 11. 21. 12:26

아버지의 꽃씨



나는 훈련병이었다. 내무반장은 집에나 애인에게 편지를 쓸 때 꽃씨를 보내달라는 글귀를 꼭 넣으라고 했다. 내무반 앞에 화단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잘 계시는 지요? 저도 전우들과 함께 씩씩하게 훈련 잘 받고 있습니다. ……제가 거처하는 막사 앞에 화단을 꾸며야 하는데요, 꽃씨를 좀 구하여 보내 주십시오. 평안히 계십시오. 모든 훈련병들이 그렇게 썼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쓴 편지를 집으로 보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남자는, 아니 아버지는 눈물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눈물짓는 모습을 평생 처음 보았지."

"언제요?"

"…… 그 날 집에 오시더니 꽃씨 봉투를 마루에 던지시고는 먼 하늘을 보시며 굵은 눈물을 흘리시더구나."

 

아버지는 꽃씨를 보내달라던 나의 편지를 받고 종묘 가게를 찾아가 화단에 심을 만한 꽃씨를 이것저것 꽤 많이 사셨다고 한다. 그 꽃씨를 싸들고 내가 훈련받고 있는 부대를 찾아 오셨다고 한다. 지금은 종종 면회도 시켜주고, 외출이나 휴가도 자주 보내준다지만, 그 당시는 훈련병에게 면회란 일체 없었고, 휴가도 입대 후 6개월은 지나야 보내 주었었다.

 

아버지 생각에는 꽃씨를 많이 들고 가면 면회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이다. 면회가 되지 않기 때문에 훈련 중에 가족과 만나는 일이란 아예 기대할 수 없고, 설사 면회가 된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면회를 오시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평소에 속정은 크실지언정 겉으로는 별로 내색을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크게 꾸짖는 일도 없으셨지만, 드러내놓고 귀애하시는 일도 없으셨다.

 

아버지는 내가 훈련을 받고 있는 군부대를 찾아와 정문을 지키고 있는 군인에게 사정을 했다. 꽃씨를 많이 가져 왔으니 아들을 좀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 물론 거절을 당했다. 훈련병은 면회가 되지 않는다고-. 아들이 언제 입대했느냐고 물어서 아무 날 입대했다고 하니, 그 날 입대한 훈련병들은 훈련을 마치고, 부대 배치를 받기 위해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하도 사정을 하기에 거짓말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실망은 이만저만 크지 않았다.

 

아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큰 기대를 걸고 왔는데, 아들을 만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니 아버지는 애가 탔다. 가슴이 재가 되는 것 같고, 말할 수 없는 처연함이 느껴졌다. 다 클 때까지도 제 어미 치맛자락을 놓을 줄 모르던 놈인데, 여태껏 살면서 부모 품이라곤 떠나본 적이 없는 놈인데, 세상 물정이란 아무것도 모르는 놈인데……. 어리고 어리석게만 보이는 놈이 그 고된 훈련을 잘 받아내고 있는지, 다친 데나 없이 몸은 성한지, 생각할수록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입대하던 날, 왜 그리 눈물이 났을까. 잘 갔다 오라며 손을 흔들던 어머니 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솟았다. 나 혼자만 가는 군대도 아닌데, 청년이면 누구나 가는 곳이 군댄데 왜 그리 눈물이 솟았을까. 나는 어머니가 마흔일 때 늦둥이로 태어나 응석받이로 자라왔다. 그런 탓에 청년이 되어 군대엘 가던 그 때까지도 늘 어리광을 부리던 응석둥이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부모를 떨어지는 것이 서러워서 그렇게 눈물이 났던가 보다.

 

아버지는 택시를 불러 나와 함께 탔다. 그 때는 감히 탈 생각을 못하던 것이 택시였다. 별로 타 본 적이 없는 택시에 나를 태워 훈련소가 있는 부대로 향했다. 고생하러 가는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애틋한 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훈련소가 있는 곳은, 지금은 도시로 개발되고 도로도 좋아져서 별로 먼 거리가 아니지만, 그 때는 교외의 산간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라 한참 험한 길을 달려가야 했다. 차 안에서도 계속 눈물이 났다.

"마음 크게 먹어라. 다른 사람들도 다들 군대엘 가지 않느냐? 너라고 못할 게 뭐냐?"

아버지는 나를 위로하여 달래려고 애쓰시다가 한참 입을 다물고 계시기도 했다. 그 때 아버지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훈련소 앞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억지로 눈물을 닦고 사람들 속에 섞여 훈련소를 들어섰다. 아버지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 계셨다. 그렇게 간 군대였지만 큰 탈 없이 3년을 복무하고 무사히 제대했다.

 

내가 군대 생활하는 동안 아버지는 입대하던 날의 내가 흘리던 눈물을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셨을 것이다. 그 때의 내 모습이 걱정스러워, 그리하여 응석둥이 아들이 보고 싶어서 꽃씨를 들고 훈련소를 찾아오셨을 것이다. 입대한 지 6개월이 지나 내가 휴가를 나왔을 때도 아버지는 훈련소로 나를 찾아오셨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왔느냐고만 하셨다.

 

세월은 쉼 없이 흘러갔다. 제대를 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느 토요일이었다. 출근을 하니 국기게양대에 조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시시각각으로 전해 오는 뉴스에 귀를 모으고 있었다.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대구의 형수였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니 빨리 와 보라고 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곳은 대구에서 대여섯 시간은 걸려야 당도할 수 있는 영양이라는 곳이었다. 대구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이미 저물었다. 길거리에는 호외가 마구 뿌려지고 있었다. 대통령이 부하로부터 시해를 당했다는 것이다.

 

집에 들어섰을 때 어머니를 비롯한 모든 식구들은 누워 계시는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버지는 반듯하게 누우신 채 눈을 뜨고 계셨지만 동공은 이미 풀려 있었다.

"작은 아들 왔소! 알아보겠소?" 어머니가 외쳤다.

아버지는 손을 겨우 드셨다. 내가 손을 잡았을 때 체온은 다 빠져나가고 없었지만, 나의 손을 쥐려고 애쓰셨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한 외마디 소리를 내셨지만,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숨을 멈추신 것은 새벽 1시 반경이었다.

 

아버지는 몇 달 전부터 병석에 누워 계셨다. 라디오를 늘 귓전에 두고 들으시며 지루함을 달래곤 하셨다. 심신이 매우 쇠약해진 상태에서,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셨던 같은 고향 대통령이 횡사했다는 소식에 심한 충격을 받으신 것 같다고 우리는 짐작했다. 그리고 곧장 넘어가려던 숨을 몇 시간이나 더 붙들었던 것은 나를 보고 가시려고 그랬던 것이라고 모두들 말했다. 아버지는 끝내 늦둥이 아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품고 가신 것이다.

아버지가 가신 지 삼십 년이 가까워 오고 있다. 내가 지금, 나를 군대 보낼 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그 때 나는 제 노릇을 옳게 할 줄을 몰라 아버지, 어머니에게 상심만 드렸다. 그 이후로도 아버지, 어머니는 나 때문에 많은 속을 끓이셔야 했다. 아버지는 그 상심을 꽃씨로 승화시키려 하신지도 모른다.

 

지난 여름에 손녀가 태어났다.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며느리는 그 아이 돌보기에 골몰하고 있고, 의공학자인 아들은 연구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내는 이 산간 벽지로 나를 따라와 사택의 텃밭 가꾸기에 마음을 쏟고 있다. 아이들이 뛰놀고 있는 운동장을 내다보며 내가 저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나는 아직도 제 노릇 옳게 할 줄 모르는 덩둘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사는 것은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이 꽃 피워진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꽃씨-. 꽃이 되어 피고 있다.♣(200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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