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생강나무의 꿈

이청산 2006. 5. 14. 17:48

생강나무의 꿈



나는 생강나무다. 지난 겨울은 너무 길었다. 겨울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눈을 떴다. 주위를 살펴보니 마른 잎과 앙상한 나뭇가지들뿐이다. 소나무 가지는 푸른 바늘을 달고 있었지만, 언제나처럼의 모습이다. 찬바람 부는 겨울을 어떻게 지내왔을까. 지난 가을 고왔던 단풍나무며 몇몇 나무는 아직도 마른 잎을 달고 있다. 지난 겨울 동안에도 나는 쉬지 않았다. 겨울 끄트머리에 피울 꽃을 준비하고 있었다. 겨울은 나에게 새로운 삶의 예비 기간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생강나무'라 부른다. 가지를 꺾어서나 잎을 비벼 냄새를 맡으면 생강의 향내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가지를 꺾고 잎을 따곤 해서 아픔을 겪기도 하지만, 나에게 주는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라고 생각하니 참을만하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이들은 나를 '산동백', '개동백', '동백나무', '아구사리'라고도 한다. 노래나 소설 속에서도 그런 이름을 쓰고 있다. "떨어진 동박은야 낙엽에나 쌓이지/ 나는야 사시장철 님 그리워 못살겠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라고 부르는 노래 '정선아리랑' 속의 '동박'도 내 이름이고,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라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김유정의 소설 속 '동백꽃'도 내 이름이다. 그래서 나는 본의 아니게 임 그리워하는 사람의 애간장을 태우기도 하고, 남의 연애하는 장면을 엿보게도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쓸모가 있는 나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도가(道家)나 선가(仙家)에서 신당, 사당에 차를 올릴 때 잔가지를 달인 물을 올리면 신령님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내 씨앗으로 짠 기름을 동백기름이라 하는데, 사대부 집 귀부인들이나 고관대작들을 상대하는 이름난 기생들이 즐겨 사용하는 최고급 머릿기름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또 이 기름은 전기가 없던 시절에 어둠을 밝히는 등불용 기름으로도 중요한 몫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옛날 옛적의 일이고, 요즈음도 참새 혓바닥 만하게 자란 애잎을 따서 말렸다가 차로 즐겨 마시는데, 이것을 작설차(雀舌茶)라 부른다고 한다. 마른 잎으로 튀각을 만들어 먹거나, 새순을 데쳐 쌈 싸먹으면 독특한 향이 있어 사람들은 그 풍미를 즐긴다고도 한다. 산 속을 걷다가 실족하여 허리나 발목을 삐었을 때는 잔가지나 뿌리를 잘게 썰어 진하게 달여 마시고 땀을 푹 내면 통증이 없어지고 어혈도 풀린다고 한다. 쓸모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하는 일 없이 살다 가거나, 남에게 해악을 끼치기만 한다면 그 삶이란 얼마나 허전하고 허무할 것인가. 물론 내 스스로 '쓸모 많은 존재'라며 자만하지는 않는다. 그저 생긴 대로 태어나 살고 있을 뿐인 것을 사람들이 '쓸모'를 찾아내어 써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내가 살 수 있는 곳은 산이면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으면 더욱 좋다. 비록 뿌리를 박기가 좀 힘든 곳이라 해도 많은 나무 친구가 있는 곳이 좋다. 소나무 잣나무도 좋고, 떡갈나무 물푸레나무도 좋고, 개나리 진달래도 좋고, 벚나무 살구나무도 좋다. 나는 키가 그리 크지도 않지만, 그리 작지도 않다. 그래서 나를 아교목(亞喬木)으로 분류하는 모양이다. 내 껍질은 많은 나무들이 그러하듯 회갈색을 띠고 있으며, 그리 굵지는 않지만 매끄러운 편이다. 나는 크고 굵게 쭉쭉 뻗은 것도 아니어서 고루거각을 짓는 재목으로 쓰일 수도 없고, 그리는 아니해도 산중에 비바람 눈보라 몰아칠 때 다른 나무를 감싸 줄 수 있을만한 넉넉한 풍채도 지니지 못했다. 그저 나는 세상의 하고많은 나무 중의 하나일 뿐이요, 그 많은 나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평범한 나무일 뿐이다. 돌고 도는 계절 따라 꽃 피우고, 잎 돋우고, 열매 맺고 사는 범상한 존재일 뿐이다.

나에게 오직 한 가지 꿈이 있다면, 추운 겨울 가면 오는 봄을 내가 제일 먼저 맞고 싶다는 것이다. 그 봄을 내가 먼저 피어나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그 봄을 맞이해야 하고, 꽃을 피워야 할 일이라면 다른 이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하고 싶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그렇게 하는 이가 있을 때 봄은 우리 곁으로 더욱 쉽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추위 속에서도 수액을 갈무리하고 꽃눈 건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땅이 얼어갈수록 뿌리를 더욱 깊이 박아 수액을 뽑아 올리고,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어 꽃눈을 감쌌다. 눈틀 준비를 해나갔다. 헐벗은 나무는 겨울을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봄을 기다림으로써 마침내 꽃을 피운다고 했다. 그 '기다림'이란 자연의 절서(節序)에 의지한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봄을 준비하고 꽃 피우기를 채비하는 시간의 흐름인 것이다. 그 흐름 속으로 산 속 매서운 겨울 추위도 서서히 꼬리를 접어 가는 것 같았다. 입춘이 오고, 우수의 절기가 되었다. 얼어 있던 계곡의 물이 미동하는 것 같았다. 봄이 오려는구나. 나는 꽃눈을 채근했다. 어서 나가 봄을 맞자고, 봄을 피우자고 서둘렀다. 무슨 색깔이 좋을까. 그래 봄의 색은 역시 노란색이야. 노란색 꽃을 피워내자고―. 내 작은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잎도 피워야 하지만, 꽃으로 먼저 세상의 봄을 맞이하고 싶었다. 대지 위에 와 있는 봄을 타고 꽃을 피울 게 아니라, 먼저 꽃을 피워 봄을 맞겠다는 소박한 마음이었다. 여러 개의 샛노란 수술을 앞세워 세상에 나왔다. 밝고 환한 모습이기를 애썼다. 내가 꽃눈을 떴을 땐 세상은 아직도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었다. 마른 잎과 앙상한 가지뿐인 산 속 세상, 메마른 대지가 조금은 생경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피운 꽃으로 모든 것들이 새봄의 다리를 건너 올 수 있다는 것이 신명났다. 욕심이 컸던 탓일까. 눈을 맞으면서도 피어 봄을 알린다는 매화보다 더 일찍 피어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나에게 황매목(黃梅木), 단향매(檀香梅)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어찌하였던 먼저 피워낸 봄으로 남에게 조그마한 즐거움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 작은 즐거움이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세상에 나서다 보면 모든 것들이 좀 서먹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련만, 그럴 겨를도 없이 친구 하나가 이내 어깨를 결어 주었다. 산수유다. 같은 색, 비슷한 모습으로 와서 내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 친구의 모습을 보면 지난 겨울을 쉽게 견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친구도 봄을 맞는 일에 무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생김새와 삶의 이력을 보니 마음도 통할 것 같다. '덕불고 필유인(德不孤 必有隣)'이라 했던가. 내가 후덕한 존재라는 말이 아니다. 쉽지 않은 세상살이에 기꺼이 다가와 벗이 되어 주는 이 친구처럼 모든 이들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사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이제 더 많은 친구들이 봄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살구꽃, 복사꽃……. 그들과 함께 더욱 아름다운 봄,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봄을 꾸미고 싶다. 더불어 즐거운 봄을 노래하고 싶다.

내년 봄을 준비할 겨울을 위하여, 다시 새봄 맞을 꽃 피우기 위하여―. ♣(2006.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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