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아내의 생일

이청산 2006. 5. 13. 20:11

아내의 생일



 생일 파티를 마치고 돌아와 아내가 말했다. 너희들 잘 들어. 그리고 당신도 들으세요. 오늘 즐겁긴 했지만, 사실은 오늘이 내 생일이 아니에요. 한달 전에 지나갔어. 뭐라고? 그럼 생일이 언제라는 거요? 이월 초이레가 아니라 정월 초이레예요. 너무나 뜻밖이었다.

시내 어느 음식점에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다. 건강하게 잘 살면 되는 거지, 생일이 뭐 그리 대수냐며 극구 반대하는 것을 억지로 달래어 차린 자리였다. 특히 먼 곳에서 와야 할 아이들을 생각하며 더욱 마다하는 것이다. 남매들이나 함께 모여 저녁 한 끼 같이 하자고 아내를 설득하고, 서울의 아이들과 몰래 의논하여 때맞추어 도착하도록 했다. 뜻밖에 나타난 아이들을 보고 아내의 얼굴에는 반가운 표정이 역력하면서도 눈동자에는 작은 경련이 스쳐 갔다. 아들의 결혼 이후 처음 맞는 생일이기도 하고, 우리의 결혼 삼십 주년을 맞는 해의 생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어미의 생일이었다. 아이들은 정성껏 마련해 온 선물과 함께 큰절을 했다. 케이크에 촛불을 밝히고 아들, 며느리 그리고 형님네, 동생네 들과 함께 축가를 부르고 박수를 쳤다.

그런데 왜 생일을 한 달이나 늦추셨어요? 며느리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너희 아버지 생일이 칠월이잖니? 너희 아버지와 결혼하고 나니 주위에서 여자의 정월과 남자의 칠월이 맞서면 좋지 않다고 말들을 많이 하더구나. 미신이라 치고 믿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몇 번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안 듣기 보다 못해. 그래서 어차피 모든 것은 믿음이요 정성인데 생일을 바꾸면 될 것이 아니냐, 가족이 행복할 수 있다면 바꾸지 못할 일도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했다. 딱 한 달을 늦추어 이월 초이레를 생일로 삼고, 남에게도 그리 말하고 자신도 그리 믿어왔다고 했다.

여태껏 아버지도 어머니의 진짜 생일을 모르고 계셨느냐고 아들이 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사주단자에도 다 적혀 있을 일이련만, 아내가 자기 생일이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만 알았을 뿐 별 다른 생각 없이 삼십 년을 살아왔다. 가족의 일에 대해 참 무관심하게 살아온 것 같다. 아내의 생일이라고 무엇 하나 따뜻하게 챙겨 준 것 없는 무심한 세월이 새삼스레 돌아 보였다. 생일을 바꾸면서까지 가정의 행복을 지키고자 한 아내의 정성 덕분인지, 지금까지 별 큰 고난 없이 살아왔다. 가끔씩 다투기도 하고 병고를 겪을 때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잘 성장해 주어 모두 번듯한 가정을 이루고, 저들 할 노릇도 잘 하고 있다. 의공학을 연구하고 있는 아들은 국제학술상을 받아 그 상패를 아비, 어미에게 안기는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아들이 제 어미에게 또 물었다. 왜 지금 진짜 생일을 밝히느냐고. 이제 너희들도 모두 실하게 잘 살고 있고, 아버지도 일 잘하고 계시잖니? 이제 내가 더 바랄 게 뭐냐. 이만하면 내 생일을 찾을 때도 됐지 않냐? 아내는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말이야, 내년부턴 내 생일이라고 따로 올 필요 없어. 설에 어차피 집에 올 것이 아니냐? 그 때 와서 내 생일 축하해 주면 돼. 며느리가 말했다. 이제야 알겠다. 어머님, 저희들 멀리서 오는 게 번거로울까봐 그걸 줄이려고 그러시는 거죠? 그래, 알긴 아는구나. 딴 생각말고 열심히 잘 살아야돼. 아이들도 쑥쑥 많이 낳고.

그랬다. 아내는 언제나 자기를 빼놓고 산다. 생일을 바꾼 것도, 진짜 생일을 밝히는 것도 모두 가족을 위한 일이었다. 자기를 빼놓는 아내의 삶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인가. 설이 돌아왔다. 이 번 설엔 아들만 다녀갔다. 입덧을 심하게 하고 있는 며느리는 일부러 오지 말라고 했다. 며느리를 못 봐도 아내는 마냥 즐겁다. 아내의 품에는 벌써 손자가 안겨 있는 것 같다. 정월 초이렛날, 나 혼자서 아내에게 축가를 불러 주었다.♣

 

'청산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할아버지의 문집  (0) 2006.10.26
손녀가 태어나다  (0) 2006.10.26
45년만의 외출  (0) 2006.08.21
생강나무의 꿈  (0) 2006.05.14
이인성 특별전에서  (0) 2006.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