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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 김만중과 연암 박지원, 그들의 한글

이청산 2006. 10. 7. 21:06

2006년 10월 7일 (토) 07:06   연합뉴스

서포 김만중과 연암 박지원, 그들의 한글

 

연암은 '한글 까막눈', 서포는 노모 위해 언문소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조선조 숙종 연간에 활약한 정계 거물이자 문인인 서포(西浦) 김만중 (金萬重. 1637-1692)을 국문학사에서는 대단히 높이 평가한다. 그 이유는 많겠지만 크게 두 가지가 거론된다.

첫째,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로 대표되는 언문(諺文)소설 작가라는 사실이며, 둘째, 송강가사(松江歌辭)에 대한 저명한 비판이 그것이다.

그가 한가할 때 붓가는 대로 쓴 글들을 모았다는 서포만필(西浦漫筆)이라는 수필집에 수록된 글에 의하면 서포는 선배 정치가요 문인인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 남긴 문학작품 중에서도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전후사미인가(前後思美人歌)의 세 가사 작품을 "동방의 이소(離騷)"라고 극찬했다.

이소란 중국의 전국시대 초나라 때 충신 굴원(屈原)이 남긴 문학작품으로 동아시아 세계를 대표하는 제1의 작품으로 거론된다. 전후사미인가란 미인을 생각하는 송강의 노래인 전작 사미인곡(思美人曲)과 그 후속작 속미인곡(續美人曲)을 합칭한 것이다.

서포는 이들 송강가사가 한문이 아니라 한글로 지어졌음을 극찬하면서 그럼에도 자기말 대신 다른 나라말(한문)을 빌려 문학하는 행위를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짓"과 같다고 비평했다.

이 저명한 서포의 비평을 대하는 많은 사람이 이렇게 묻곤 한다. "그런 서포가 왜 이 비평은 한글로 쓰지 않고 한문으로 썼는가?"

서포는 왜 그랬을까?

독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글들을 서포는 만필(漫筆), 즉, 한가한 시간에 생각나는 대로 휘갈겨 쓴 글이라고 짐짓 겸손을 가장했으나, 누군가가 이런 그의 글을 읽어주리라 확신했다. 그 독자는 동시대 동료들일 수도 있고 후세일 수도 있다. 둘 다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어주고, 그런 그의 생각에 동조를 해 주어야 할 독자는 서포 그 자신과 같은 사대부들이었다. 사대부들을 독자층으로 겨냥한 서포는 그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표현수단인 한문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송강가사가 훌륭하다는 비평을 평범한 백성 서민이나 노비, 혹은 아낙네, 나아가 어린이가 읽어주리라 기대하기란 당시 시대상황에서는 실로 곤란하다.

독자층에 따라 표현수단을 달리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같은 서포가 지은 글로써 한글소설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에서 분명하게 발견된다.

왜 서포는 이 두 소설을 한글로 썼을까?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 주된 독자는 혼자된 그의 노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사대부가 출신이므로 한문에 문맹은 아니었을 것이나, 당시 여타 사대부 집안 여인들의 수준을 고려할 때 썩 빼어난 한학 실력을 갖추었다고 하기 힘들 것이며, 노령으로 인해 시력조차 좋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한글에 대한 각종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한글은 아낙네의 글이라는 지적이 자주 눈에 띄는데, 그래서 한글은 '천하고 속된 글'이라 해서 '언문(諺文)'이라 불렸다. 서포의 어머니 또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문보다는 언문이 훨씬 읽기 편했을 것이다.

서포가 송강가사에 대한 비평을 한문으로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사대부층 남자들 중에는 아예 '한글 까막눈'이 많았다는 사실에서도 역설적으로 증명이 된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서포보다 꼭 100년 뒤에 태어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다. 열하일기며 양반전, 허생전을 비롯한 주옥 같은 문학작품을 다수 남긴 그는 요즘에 와서는 한국의 셰익스피어에 비견될 만큼 뛰어난 문장력이 높이 평가받는다.

한데 이런 문학천재 연암은 한글 문맹이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의 안성맞춤은 사실 연암이었다.

연암이 한글을 몰랐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최근 공개된 그의 서간문집에서도 그런 면모가 다시금 드러났다.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한 대목을 보면 "나는 언문을 모르니까"라는 말이 나온다.

서포가 송강가사를 비평한 수필을 쓰면서 이런 글을 읽어주리라 기대한 독자는 분명 박지원 같은 사대부들이었다.

만약 서포가 그 비평을 언문으로 썼다고 해 보라. 연암 같은 '한글 까막눈'이 그런 언문 비평에 눈길이나 한 번 주었겠는가?

표기수단으로서의 한글(훈민정음)이 놀라운 것은 많은 한국인이 얘기하듯이 그 뛰어난 과학성에 있지 않다. 영어가 과학적이지 못해서 지금의 세계언어로 성장했겠는가? 한문이 비과학적이라서 13억5천만명이 사용하는 표기수단이 되었겠는가?

한글의 놀라움은 연암 같은 대문호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음에도 그런 박해와 핍박들을 견디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글은 세계문화유산이 되기에 족하며, 그것이 견딘 모진 풍상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창제되어 반포된 날이 국경일로 기념되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