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수필

금강산행에 대한 기억

이청산 2006. 6. 16. 10:10

감탄(感歎)과 비탄(悲歎)
- 금강산행에 대한 기억



금강산에서 돌아온 새벽에 잠이 들었다. 꿈자리가 어지러웠다. 새까만 얼굴에 앳된 체구의 인민군과 마주쳤던 눈길이 잊혀지지 않았다. 경계와 증오의 싸늘한 눈초리로 느껴지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처연한 그림자가 보이던 그 눈동자가 망막 속을 맴돌았다. 그 눈동자는 만물상의 삼선암, 귀면암, 절부암에서 보았던 여러 가지 형상들 중의 하나로 새겨지면서 감탄과 비탄이 뒤섞인 금강산 기억이 되고 있다.

 

 ㅇ 감탄편(感歎篇)

남측과 북측의 CIQ[Customs(세관), Immigration(출입국관리), Quarantine(검역)] 검사를 다 마치고 9시경에 도착한 온정각으로부터 금강산 기행은 시작구룡연과 만물상의 갈림길된다. 북한이 개방하고 있는 외금강의 구룡연 코스와 만물상 코스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와 보기가 쉬운 길이 아닌데 한 곳을 제쳐 두기가 여간 아쉽지 않았지만, 일행은 우리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만물상으로 여정을 잡기로 의견을 모았다.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는 금강산버스로 옮겨 타고 만물상으로 향했다. 12층의 금강산호텔과 천연 온천수를 자랑하고 있는 금강산온천을 지난다. 온정각에서 본 수정봉아침 햇살이 비치면 봉우리 전체가 수정처럼 빛난다는 둥그스레한 수정봉을 차창으로 스친다. 모습이 아름다워 미인송, 색깔이 붉어 적송, 홍송으로도 불린다는 금강송, 그 숲을 지날 때 원 없이 죽죽 뻗은 솔가지에서 은은한 솔향이 차창으로 스민다. 굵은 선의 커다란 바위들이 장중하게 이어지는 관음연봉과 중관음봉 자락에 높다랗게 걸려 있는 관음폭포며, 육각형의 흰 바위가 달빛에 비치면 눈꽃을 연상케 한다는 육화암(六花岩)을 차창 밖으로 스치기만 하기가 너무 아쉬웠지만, 워낙 제한된 시간이라 만 가지 형상의 장엄한 만물상을 향해 오르는 버스에 모든 것을 맡겨 둘 수밖에 없다.  

버스는 사행(蛇行)의 가파른 길을 기듯이 올라간다. 온정령 일백 여섯 구비 중에서 일흔 일곱 구비를 이 차로 돌아 오른단다. 굽이가 심할 때는 오르는 차와 내려오는 차가 분간되지 않을 지경이다. 좁은 길을 따라 숨차게 올라온 버스가 멈춘 곳은 만상정(萬相亭) 아래의 주차장이다. 만상정은 만물상과 온정령, 그리고 상등봉을 오르내리는 길목에 자리잡은 정자다.

금강산 안내원일행을 맨 먼저 맞이하는 사람은 푸른색의 제복을 입고 김일성 배지를 가슴에 단 이십대 중반의 처녀인 듯한 안내원이다. 핸드마이크를 들고 안내판 앞에서 북한 말 특유의 억양으로 만물상 등산로를 상세하게 안내한다. 처음으로 접해 보는 북한 사람과 그 말씨가 깊은 인상으로 새겨진다. 안내원은 만물상 경내 곳곳에 배치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다. 똑 같은 제복에 모두 김일성 배지를 달고 똑 같은 억양의 말로 경치를 안내한다.

김일성이 다녀감을 기록해 놓은 비석만물의 형상을 얼른 보고 싶어 발길을 재촉하려는데 문득 붉은 글씨의 비석 하나가 발길을 막아선다. 누가 언제 세운 것이라는 표시도 없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천구백사십칠년 구월 이십일 몸소 이곳 만상정에 찾아오시여 금강산을 문화휴양지로 더 잘 꾸릴데 대한 강령적 교시를 주신 곳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위대한 수령'의 발자취는 만물상을 오르내리는 곳곳에 새겨져 있다. 자연의 주인은 무릇 자연 그 자체인 것을 어느 한 사람의 발길이 대단한 뜻이 있는 것인가. 아름다운 경치에 흠을 지운 것 같아 개운치 않다. 자연의 절경은 보는 사람의 마음은 아랑곳 않고 무궁무진한 자태를 한껏 뽐내며 만상의 모습을 간직한 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만상정 협곡을 따라 오르는 길에 맨 처음으로 나그네를 맞는 것은 삼삼선암선암(三仙岩)이다. 깎아 세운 듯한 세 개의 바위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같다는 삼선암은 험상궂은 도깨비 형상의 귀면암과 함께 만물상 들머리에서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다. 계곡을 따라 장엄하게 펼쳐지는 만물상(萬物相), 만물상이란 어떤 특정한 것의 이름이 아니라 만상정으로부터 망양대에 이르기까지의 온정령 일대를 일컫는 말이다.

길을 오르다가 잠시 서서 둘러보면 사방이 절묘한 형상의 바위들이다. 한 쌍의 원앙새,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는 듯한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 절부암일곱 층으로 포개어진 칠층암, 힘센 장수가 큰 도끼를 들어 바위 중턱을 찍어놓은 것 같다는 절부암(折斧岩)을 지나 70∼80도의 가파른 경사를 굽이굽이 오르면 말안장처럼 생긴 곳에 이르게 되는데, 비로소 가풀막의 위태로움에서 벗어나 안심하고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는 안심대(安心臺)다.

천선대, 망양대로 향하는 협곡에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고성(古城) 같기도 하고, 커다랗게 피어난 풀잎 같기도 한 모양으로 도열해 있는 석순(石筍)들이 빚어내는 기묘한 형상들, 이를테면 멧돼지·거북이·아기 업은 엄마·할아버지·할머니·스핑크스·코뿔소·사자·솥뚜껑 모양 등 천연 조각품들의 모양은 사람들의 혼을 일시에 휘젓고 만다. 바위가 세상의 것을 흉내내고 있는지 세상 모든 것이 만물상산을 찾았다가 산이 너무 좋아 주저앉아 버린 것인지 온 세상이 이 골짜기에 다 모인 것 같다. 운우(雲雨)와 풍설과 일월이 함께 힘을 합쳐 빚어낸 대자연의 조각품들, 어느 조각가가 이 험산 준령에 올라 저리도 천연스런 형상들을 이루어낼 수 있단 말인가. 오만 가지 형상이 모여 있어 만물상이라 했거늘, 이름처럼 사람들의 만 가지 상상력을 숨가쁘게 불러일으키고 있다.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바위의 형상만도 아니다. 혹은 바위 끝에 서서 팔 벌려 깃발을 날리고 있는 모습으로, 때로는 깎아지른 벼랑 끝에 뿌리를 박고 바짓가랑이 잡는 아낙의 손길을 뿌리치기라도 하려는 듯한 자세로, 혹은 맨몸을 감싸는 포근한 옷자락처럼 바위를 장식하고 있는 나무들의 모습도 가관이다. 그리고 때로는 우뚝 솟은 기암들의 발치를 맴돌다가, 때로는 허리춤을 정겹게 감쌌다가, 때로는 두건이 되어 머리를 감아 도는 구름이 산과 어울리며 몇 자락 선경도(仙境圖)를 연출해 낸다. 그 절경에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선 채로 얼어붙어 또 하나의 바위가 되어 버릴 듯하다.

 가파른 철삭그러나 또 다른 절경들이 기다리고 있음에 정신을 수습하여 발길을 떼어놓으면, 장엄한 풍경을 눈에 담을 겨를 없이 거의 직각에 가까운 경사로 바위틈에 걸려 있는 철삭(鐵索)에 매달려야 한다. 앞서 오르는 사람의 장딴지만 보며 곡예를 하듯 오른 곳에 나타나는 장관은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해발 936m의 천선대(天仙臺)다.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수백 길 벼랑 위에 만물상 전경을 일망무제로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자리잡고 있다. 기묘, 절묘, 오묘한 절경을 원 없이 눈 속으로 끌어넣으니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오히려 가슴을 서늘케 하면서 온몸에 전율이 솟는다. 또 하나 전율에 젖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모년모월모일에 수령님이 다녀가시면서 '만물상은 우리 인민의 불굴의 기상의 상징이라고 교시'하시었다는 그 붉은 글씨이다. 대자연의 장관을 보며 감동에 젖기 전에 인민의 기상을 먼저 떠올린 것은 탁월한 영도자의 속성이란 말인가.

하늘문한 발 내려서면 문득 다가서는 문이 있으니,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정도의 자연 석문인 하늘문[天一門]이다. 이 '좁은 문'을 통과하면 하늘로 가는 길이 열리는 걸까. 또 다른 하늘이 열리는 걸까. 문을 통과하니 절벽 틈을 뚫고 흘러나오는 석간수가 기다리고 있다. 이 물을 마시면 힘이 솟구쳐 짚고 온 지팡이마저 잊어버리고 단숨에 천선대를 오른다는 망장천(忘杖泉)이다. 사방 바위밖에 없는 곳에 사시사철 끊임없이 물이 나온다니 만물상이 지닌 또 하나의 신비가 아니랴.

드디어 하늘문은 또 하나의 하늘을 펼쳤다. 이 좁은 관문을 통과하니 드러나는 하늘과 능선, 천주봉에서 망양대, 세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넓게 열린 하늘을 머리에 이고 옥빛 동해 바다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 능선 속 굽이진 길을 가쁜 숨 몰아 쉬며 달음질로 올라 망양대(1,031m)에 선다.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망양대(望洋臺)는 세 곳이다. 제1망양대는 여태껏과는 다른 각도에서 만물상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수만 개의 커다란 석순들이 날선 창칼로 서 있는 듯한 만물상의 또 다른 절경이 펼쳐진다. 이름처럼 바다를 바라기 위해서는 제2망양대가 제격이다. 저 멀리 천불산 너머로 띠를 이루며 가물가물 뻗어 있는 장전항 하얀 모래사장, 부서지는 물보라와 함께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곧장 들려 올듯하다. 별금강이라는 저 아래의 천폭동, 천불동 아름다운 계곡을 가까이서 볼 수 없만물상는 것이 안타깝다. 제3망양대는 동남쪽의 문주봉,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금강의 또 다른 비경을 펼쳐준다. 부드럽고 살가운 곡선미를 이룬 바위들이 만물상 정경과는 다른 분위기로 시선을 자극한다. 하늘을 안은 동해 바다, 그 바다를 망양대들이 지긋한 눈길로 다시 포옹하고 있다.

어딘들 산, 나무, 바위, 하늘이 없으랴만, 나뉜 듯 섞이고 섞인 듯 나눠지며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고, 눈길 따라 몸 바꾸기를 거듭하며 오만 형상을 다 빚어내는 이 신비경이 금강 말고 또 있을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글만물상로 다 형용할 수 없어 애가 탈 따름이다. 기막힌 조물주의 언어, 하늘의 어법을 궁색한 인간의 문법으로 재현하려는 것이 애초부터 어리석은 일인 지도 모른다.

내림길을 잡아 만물상 속을 내려오면서 울렁이는 가슴을 몇 번이나 쓰다듬어야 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괴로움이든 즐거움이든, 상상치 못했던 일, 너무도 엄청난 일을 당했을 때의 '울렁임', 그것이다. 형언할 길 없는 감동과 그 감탄이 뇌파를 떨게 했는데, 뇌파도 그 감동을 감히 감당할 길 없어 가슴으로 떠넘긴 탓이리라.

 

ㅇ 비탄편(悲歎篇)

오전으로 돌아 오라 하여 서두르긴 했지만 만물상 황홀경에 취하다 보니 시간의 흐름을 잠시 놓친 탓일까, 출발점인 만상정으로 되돌아 온 것은 정오가 훨씬 넘어서였다. 온정각으로 데려다 줄 버스가 금강산 번호판을 단 버스기다리고 있는데, '금강산ㅇㅇㅇㅇ'라 번호판을 단 버스는 하산객이 다 차기를 기다려서야 시동을 걸었다. 오후 1시가 가까울 무렵 동승한 안내인이 '지금 온정각으로 가면 시간이 없어 삼일포 관광은 못할 것 같고 점심 식사 후 온천욕을 즐기며 출경시까지 쉬시라'고 했다.

아뿔싸, 언제 다시 와 볼 거라고 '삼일포'를 못 가게 되다니! 신라 4국선(四國仙 : 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이 절경에 매료되어 사흘이나 돌아갈 일을 잊었다는 곳 아닌가. 관동팔경을 하루에 한 곳씩 보리라 작정하고 길 떠나온 어떤 왕이 아름다운 경치에 빠져 사흘이나 놀았다는 곳 또한 아니던가. 좀 늦으면 어때! 안 가 볼 수야 없는 일이지.

그러나 사정은 허락하지 않았다. 오후의 여정은 여행비와는 별도로 12달러를 내고 온천욕을 즐기거나, 10달러를 내고 삼일포를 관광하도록 스케줄이 짜여 있는데, 온천욕은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삼일포 관광을 하려던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1시 반에 삼일포로 출발하는 차를 타야 온정각을 떠나야 할 시각 3시50분과 북측의 출경 검사 시간인 5시를 맞출 수 있다는 것이다. 여름 5시면 해가 중천에 있을 땐데 서둘러 쫓아내려는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금강산호텔누구도 어길 수 없는 율법이라 하릴없이 굽이진 산길을 내려와 금강산호텔에 도착했다. 우람한 건물이 사람을 압도하더니,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흰 저고리 검은 치마를 입은 두 아가씨가 허리 굽혀 인사한다. 북에서는 '아가씨'란 말이 가당찮다. '접대원 동무'라고 해야 한다나. 12달러를 주고 비빔밥으로 예약한 식권을 들고 2층의 식당으로 갔다. 호텔의 규모에 비해 식당은 자그마했다. 원탁에 앉으니 접대원 동무가 와서 인사를 한다. 비빔밥을 달랬더니 떨어지고 없다고 하면서 냉면을 드셔야 한다고 했다. 예약도 무용지물, 고객 위주가 아니라 경영 위주다. 조그만 컵에 따라 주는 물, 작은 대접에 넉넉잖게 담은 냉면. 생선전과 녹두전 조금씩을 전식(前食)으로 주긴 했지만, 값에 비해 양이나 맛이 그리 신통치 못했다. 로비에서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는데, 남쪽의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한 노점상 수준의 것이다. 1달러를 달라고 한다. 1달러는 1,080원이라며 환율을 게시해 놓고 남쪽 화폐라면 1,100원을 내라고 한다. 북의 다른 곳에서는 모르겠으나 금강산 일대에서는 1달러가 화폐의 기본 단위이다. 생수 작은 병 하나도 1달러이고, 산행 중 간이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면 1달러, 대변을 보면 2달러, 여자는 대소변 불문하고 2달러다.

온정각 매장에서는 남쪽의 최신 유행가를 틀어대며 손님을 부르고 있다. 여러 가지 기념품이며 북한 술을 팔고 있는데, 상품의 질이나 디자인이 남쪽보다 이십 년쯤은 뒤져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거래의 기준 화폐는 모두 달러다. 모든 것이 남쪽보다는 훨씬 비싼 것 같다. 이리해서라도 살아야겠다는 북녘 동포들의 삶에 대한 고투(苦鬪)가 보이는 것 같아 오히려 아릿한 느낌이 스민다.

정몽헌 추모비온정각 광장 가장자리에 서 있는 정몽헌의 추모비가 보는 이의 마음을 또 아리게 한다. 온정각 일대의 모든 시설물은 물론 금강산 관광 사업 자체가 그의 작품이 아니던가. 북쪽을 살게 해 준 그 은혜를 기려 북에서 세운, '그의 혼과 백 영원히 하나 된 민족의 동산에서 춤추리'라는 말로 끝을 맺는 비문은 도올 김용옥(金容沃)이 썼다. 현재형의 문장인가, 미래형의 문장인가. 현실의 일은 아닌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 금강산을 떠난다. 감동은 간직하고 아쉬움은 벗어두고 떠나고 싶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칼로 자르듯 할 수 없는 것이니 아쉬움도 금강산 선물로 알고 보듬고 가는 수밖에 없다.

지난밤부터 시작하여 금강산에 오르기까지의 일들이 꿈속의 일처럼 다시 떠오른다.

문경에서 밤차를 달려 제천역에 도착하고 자정이 넘은 시각에 동해행 열차를 타고 미명에 동해역에 내리고, 금강산행 버스를 갈아타고 아침을 남북출입사무소 앞에서 맞기까지의 과정은 기억의 저편에 묻어 둘 수도 있다. 밤을 어차피 차안에서 지새워야 하기로 차의 속도감을 모른 체하며 밝은 날의 아름다운 금강산을 위해 억지로 눈을 감으며 잠을 청해야 했던 수고로움은 차라리 경쾌한 기대감으로 지울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만물상 입구의 귀면암수많은 관광객들 틈에 끼어 줄지어 신분을 확인 받고 검색대를 통과한다. CIQ 검사와 더불어 소지품을 검사하는 절차다. 외국으로 나갈 때보다 더 삼엄한 것 같다. 터널을 지나고 말뚝으로 세워진 휴전선을 넘어 북측의 비무장지대를 건너간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북측의 출입검사였다. 남측에서 CIQ 검사를 받은 지 불과 20분도 못 되어 또 검색대 앞에 서야 하는 것은 당혹스런 일이었다. 스피커에서는 '반갑습니다'라는 북한 가요가 흘러나오는데 인민군 복장의 검사원은 별로 반갑지도 않은 표정으로 신분을 확인한다. 이념이란 참 무정한 것이어서 인간의 온기를 앗아가 버렸기 때문일까, 마른 얼굴에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을 한 검사원의 움직임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의 동작 같다. 힘들게 검사소를 통과하여 북한 땅으로 들어선다. 북측에서는 꼭 '조장'이라 불러야 하다는 동승한 안내원이 버스에 커튼을 치지 말 것, 이동 중에 창 밖 풍경을 촬영하지 말 것을 몇 번이나 당부한다.

분단선은 휴전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 양쪽에 연두색 철조망이 길게 늘어서 있다. 북한 사람들과 관광객과의 접촉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그 철책 너머 언덕배기 곳곳에 부동 자세를 한 인민군이 서서 지나는 차량들을 지키고 있다. 촬영을 못하게 감시하기 위해서란다. 보이는 것은 산이요, 들 뿐이라 큰 군사 기밀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무엇을 그리 숨기고 싶은 것일까.

거의 옥수수밭이나 콩밭으로 이어지는 들판, 빈 밭에선 문득 소를 몰아 이랑을 타고 괭이를 들어 흙덩이를 깨는 모습이 보인다. 오래 전 우리 시골에서 보던 풍경이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도, 소도 너무 야위었다. 소는 모두 국가 소유로 되어 있는 것이라 누가 애써 기르지 않고 자연 방목으로 배를 채우기 때문에 저리 마른 것이라는 '조장'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사람들도 제대로 못 먹어 저리 마른 것일까. 공산주의의 한 그늘이 보이는 것 같다.

차창을 스쳐 가는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 꼭 60년대 군대 생활 시절, 민통선 부대에서 겪었던 토막사(土幕舍)의 모습 같다. 그 때는 흙벽돌로 분대(分隊) 막사를 지어 거처했는데, 방 한둘에 부엌을 달고 봉창을 내어 환기를 했다. 외벽은 흰 페인트를 칠하고 띠를 잘라다가 지붕을 입혔다. 꼭 그 모양의 집들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모옥(茅屋)이 아니라 와옥(瓦屋)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붕에 얹힌 것이 기와라기보다는 희끄무레한 시멘트 조각들을 얹어 놓아 너와집 같이 보인다. 모든 집들의 모습이 다 그러했다. 전체주의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인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학교의 모습도 그러했다.

금천리를 지날 때였다. 인가를 몇 채 이어 놓은 듯한 좀 큰 건물이 보였다. 크기가 다를 뿐  인가의 모습과 꼭 같다. 뒤쪽에서 보았기 때문일까. 통풍구만 보일 뿐 유리창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남쪽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 건물이라 했다. 50년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학교는 양철지붕에 판자를 잇대어 지은 목조 건물이었다. 그래도 교실 앞뒤로 유리창이 있어 교실은 환했다. 그 때 우리 학교의 건물보다 나은 것 같지 않다. 운동장에는 검은 바지에 흰 저고리를 입은 아이들 몇이 뛰어 놀고 있는 모습이 언뜻 차창을 스친다. 우리 어린 시절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지금 북쪽은 우리의 50년대를 살고 있단 말인가. 저들이 숨기려는 것은 군사 기밀이 아니라, 이런 궁기(窮氣)와 가난이 아닐까. 인류 생활의 가장 이상적인 체제라던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허구성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행 중의 누구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일부러 저리 해 놓은 것 아닐까?"라고도 했다. 아름다운 금강산을 보러 가는 마음에 어둠살이 지게 한다.

오는 길에도 그랬던 것처럼 가는 길에도 연두색 철조망은 늘어서 있고 그 너머 곳곳에서 인민군들이 차량을 주시하고 있다. 모두가 왜소한 체격에 야위고 검게 탄 얼굴이다. 갓 스물은 되었을까, 매우 앳되어 보이기도 했다. 여름 더위에도 불구하고 둥근 모자를 쓰고 긴 팔의 두꺼운 제복 위에 가죽 어깨띠까지 두르고 부동 자세로 서서 지나가는 차량에 눈길을 꽂고 있다. 문득 힘주어 뜬 눈동자 하나가 망막 속에 꽂힌다. 원망인지 선망인지, 증오일지 경원일지 모를 눈빛이 찌르듯이 꽂혀 왔다. 그 눈빛은 줄곧 뇌리 속의 따가움으로 남았다.

깡마르고 작은 체구의 인민군들. 어떤 병사 하나는 더위에 지쳤는지 삼엄할 군률도 아랑곳없이 모자를 벗은 채 주저앉아 있기도 했다. 군대 생활이야 어디 없이 힘들겠지만, 참으로 힘들게 복무하고 있는 것 같다. 남방 한계선을 넘어 올 때 보이던, 훤칠한 키에 체구도 당당하던 남한의 병사들과 너무 대조가 되는 듯했다. 그 병사들을 가리키며 일행중의 누가 안타까움에 겨운 듯이 말했다.

"저 건장한 아이들 좀 봐! 북쪽은 역시 살기가……?"

살기 어려워 보이는 것은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차창 밖으로 언뜻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도 그랬다. 건널목에서 행인들이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행색들이 무척 고단해 보였다. 동네와 집들의 모습, 들판이나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 호텔 식당의 상차림 등에서 느낀 인상과 그 행인들에게서 느껴지는 인상이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생활상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다시 들판 풍경이 펼쳐진다. 인력이 부족한 탓일까, 열심히 일하지 않는 탓일까, 군데군데 묵정밭이 보인다. 작물이 재배되고 있는 곳도 모두 노지(露地) 재배일 뿐 남쪽의 들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닐하우스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들녘 너머로 보이는 산들은 거의 민둥산이다. 접적 지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일까, 베어 내기만 하고 조림에는 힘을 기울이지 않은 탓일까. 금강산의 울창한 소나무 숲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한국 전쟁 때 격전지여서 그렇다는 안내자의 설명이지만, 반세기가 넘는 세월 전의 일이 아닌가. 생활이 너무 고단하여 나무 심을 여력이 없는 것은 아닐까.

북측 CIQ 검사소에 이를 무렵 커다란 건물을 짓고 있는 공사장이 보였다. 지금은 임시 검사소에서 CIQ 검사를 하고 있는데, 본 검사소를 짓고 있는 중이라 했다. 공사장 주위와  골조 위에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기계 장비가 부족하여 거의 인력으로 해내는 모양이다.

줄을 서서 신분을 확인하고 소지품 검사를 받으며 검색대를 통과했다. 감사원의 표정 없는 깡마른 얼굴은 들어올 때나 나갈 때나 똑 같다. 남쪽의 검사소를 다시 거쳐 남방 한계선을 완전히 벗어났다. 누가 말했다.

"통일이 언제 될라노?"

"통일이 되면 살기가 어떻게 되겠어요?"

"글쎄요……."

"안 되어도 걱정, 되어도 걱정이네요."

통일의 당위성은 다들 생각하면서도, 통일 후에 겪어야 할 혼란과 부담을 걱정하는 말이다. 금강산의 아름다움, 그 감동은 마음 속에만 깊이 간직한 탓인지 그 감탄의 순간들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누가 말했다. "내 나라 땅 마음대로 다니자면 통일이 되어야지요. 금강산 한 번 구경하기 이리 힘들어서 되겠어요?" 그리고 모두들 눈을 감는다.

 

 무박 3일간의 금강산 여행, 밤차로 와서 밤차로 돌아간다. 감탄과 비탄이 함께 엉겨 있는 심정은 나만의 마음일까. 밤을 돋우어 달려 왔던 길, 숨가쁘게 올랐던 만물상, 어둠을 가르며 달려가는 귀로, 그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금강산의 벅찬 감동과 금강산 마을사람들의 고단한 모습이 자꾸만 겹쳐진다.

비탄을 걷어낸, 감탄으로만 금강산을 볼 수 있는 날이 언제쯤 올까. 우리 생애에 올까.

이 특별한 체험을 글로 하나 남기긴 해야 할 텐데, 자꾸만 떠오르는 말은 두 낱말뿐이다.

'감탄, 비탄 ……'

내 금강산행에 대한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