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이인성 특별전에서

이청산 2006. 5. 13. 20:10

이인성 특별전에서



이인성의 생전의 모습대백갤러리에서 열리는 '이인성 작고 55주년 특별전'에 다녀왔다.

'한국의 고갱'으로 불리었던 천재 화가 이인성(李仁星)은 일제 강점기인 1912년에 대구의 한 극빈한 가정에서 태어나 1930년대부터 우리 나라 서양화 화단을 풍미하다가 한국전쟁 중인 1950년에 38세로 요절하게 된다. 그의 생애는 비록 짧았지만 18세의 약관에 당시의 관전인 '조선미전'에 입선한 이래, 1944년의 마지막 미전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15년 간을 줄기차게 출품할 정도로 그림을 위한 열정적인 생애를 살다가 갔다. 그리하여 그는 '천재 화가', '근대 화단의 귀재', '기린아', '선전 최대의 감동' 등의 화려한 수식어가 그의 이름을 늘 따라 다닐 정도로 찬란한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의 사후인 1954년 7월에 첫 전시회가 열린 이래 51년 만에 그의 전시회가 열린 것이다. 수채화에서 유화, 풍경화에서 인물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많은 작품이 전시된 갤러리는 그의 체취와 함께 예술의 향취가 넘쳐나고 있었다. 과일과 꽃을 소재로 한 정물화며 자화상을 비롯한 인물화도 물론이지만, 향토색 짙은 수채와 유채의 풍경화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짙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특히 캔버스에 짙은 유채로 그린 이인성의 '어느 가을날'(1943년,캔버스에 유채,97x161.4cm)'어느 가을날'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강렬한 터치의 이 그림은 이국적인 정취가 느껴지는 듯하면서도 소재에서는 향토적인 체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짙은 손때가 묻은 포크, 나이프, 팔레트 등의 유품에는 그의 예술적 열정과 고뇌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듯했다.

전시장의 사방을 둘러 싼 그의 작품들을 둘러보며 감상하던 중에 어느 작품 앞에서 나는 한동안 움직일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이인성의 작품들과 함께 그와 같이 활동했던 몇몇 화가들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향토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작품 활동을 함께 하면서 순수 미술을 지향했던 서동진, 박명조, 김용준, 배명학 등 제씨의 작품들이 보였다. 내가 걸음을 떼지 못하고 보고 있었던 것은 박명조(朴命祚, 1906∼1968) 화백의 수채와 유채로 그린 풍경화였다. 문득 사십여 전의 일이 아련한 영상이 되어 기억 속에서 살아났다.

그 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박 화백은 나의 담임 선생님이시면서 미술 선생님이셨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제 알고 보니 선생님은 일제 때의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에 수 차례 입선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동진과 함께 영과회(1926), 향토회(1926)를 결성하는 등 대구화단을 주도했던 명망 높은 화가이셨다. 미술실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갖가지 미술 교재와 함께 선생님의 작품 활동을 위한 여러 가지 기구와 작품들이 있었다. 미술실은 학생들의 미술 학습실 겸 선생님의 화실이었다. 선생님은 풍경화를 많이 그리시는 듯했지만, 생물도감의 편찬을 위해 새 종류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계시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엄격(嚴格)'과 '인자(仁慈)'를 겸비하고 계셨던 것 같다. 학생들의 잘못을 다스리실 때는 따끔한 매질과 함께 추상같은 말씀으로 꾸중을 하시는가 하면, 때에 따라서는 봄바람 같이 부드러운 말씀과 웃음으로 타일러 주기도 하셨다. 그래서 학생들은 선생님을 매우 어렵고 두렵게 생각하면서도 응석을 부리듯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그 때 선생님은 회갑을 바라보고 계실 때였으니, 일찍 이세를 두셨다면 우리들은 맏손자뻘쯤 되는 처지였다.

나는 특별히 잘하는 공부도 없었지만 미술에는 특히 재주가 없었다. 그림을 보는 것은 좋아해도 그리려고 하면 도무지 그림이 되지 않았다. 미술 시간이 되면 다른 과목보다 골치 아프지 않아 좋기도 했지만, 그리기를 할 때가 되면 미술 시간이 싫었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것도 싫었지만, 선생님께 꾸중을 들을까봐 마음 졸이는 일이 즐겁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미술 시간에 운동장에서 학교 풍경을 그리는 수업을 했다. 한참 그리다가 수업 시간 안에 다 그릴 수가 없어 일과를 마칠 때까지 각자 완성하여 선생님께 제출하기로 하고 수업이 끝났다. 스케치는 그럭저럭 하였으나 채색에 영 자신이 서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제대로 칠해지지 않았다. 선생님께 꾸중을 들을 일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다. 어찌하면 좋을까를 궁리하다가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 명수가 떠올랐다. 그림 솜씨가 좋아 선생님께 칭찬도 많이 받을 뿐만 아니라 각종 미술대회에 나가서 입상도 많이 한 친구다. 명수에게 부탁을 했더니 멋지게 물감을 입혀 주었다. 꾸중을 면할 수 있을 같아 안도하며 선생님께 제출하였다.

이튿날, 방과후에 선생님께서 나를 미술실로 부르셨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선생님께 갔더니 어제 내가 제출한 그림을 보여주시며 '네가 그린 것이냐'고 물으셨다. 곧장 불호령이 떨어지리라 생각하니 다리부터 떨렸다. 내가 그린 것이라고 했다. 또 무슨 말씀을 하실지 몰라 더럭 겁이 나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허허! 그래? 아주 잘 그렸다. 그러면 어디 여기다가 다시 한 번 그려보아라. 아주 재주가 있구나. 내가 좀 나갔다가 올 터이니 그려 놓도록 해라."

선생님은 도화지 한 장을 주시고는 밖으로 나가셨다. 선생님은 내가 그린 것이 아님을 아시는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그려 놓지 못하면 큰 벌을 받을 것임은 뻔한 일이었다. 모든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온몸이 땅으로 내려앉는 듯했다. 땅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아주 먼 곳으로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붓 대신 연필을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대신 글을 적기 시작했다. 그 때 무어라고 적었는지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사실은 제가 그린 것이 아니라 제 친구 명수가 그려준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선생님께 벌을 받을 때보다 더 큰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어떠한 꾸중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크게 꾸짖어 주십시오. 앞으로는 절대 이런 행동하지 않고 미술을 비롯한 모든 공부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 그림을 그려준 명수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명수에게 벌을 주시려면 저에게 주십시오. 제가 모든 벌을 받겠습니다.……"

그림 대신 편지글을 이젤 위에 얹어 놓고 미술실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잘 때에도 내내 벌받는 꿈만 꾸었다.

이튿날 등교하자마자 단단히 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선생님을 찾아갔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겠습니다."

"무엇을 잘못했느냐?"

"친구에게 그려달라고 한 것이 잘못입니다."

"또?"

"선생님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곧 불호령과 함께 회초리가 날아오리라 생각하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하하! 이 놈, 명수 솜씨라는 걸 내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불호령 대신 떨어진 것은 선생님의 호탕한 웃음 소리였다. 선생님은 그림 솜씨만 보면 누가 그린 것인지 다 아신다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네가 써 놓은 글 잘 봤다. 앞으론 그런 일이 없도록 해!"

선생님의 꾸중은 이것으로 끝났다. 매우 엄격하신 분이라고 느껴왔던 선생님의 모습이 그 순간만은 참으로 인자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겉으로는 엄격하시면서 속으로는 따뜻한 정감을 가지셨던 것 같다. 그 '따뜻함'이 선생님이 추구하시던 예술의 바탕이 아니었을까. 선생님은 예술가인 동시에 교육자이셨다. 교육자로서의 도덕적 근엄성과 예술가로서의 심미적 온화함을 함께 갖추고 계셨던 것 같다. 그 '온화'를 나에게 베풀어주신 것은 선생님이 나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이후 나는 모든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리고 정직한 사람이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잘 지켜지지 못했다. 사십여 년 세월이 흐른 지금, 선생님은 돌아가시고 내가 그 때의 선생님과 같은 나이가 되었다. 그리 흐른 세월 속에서 나는 미술 공부를 열심히 하여 그림을 잘 그리게 되지도 못했고, 다른 공부에 열중하여 학문적 성취를 얻지도 못했다. 선생님의 유작을 보고 있으려니 내 살아온 삶이 참으로 부끄럽게 느껴진다. 오늘의 내 삶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려고 애써 왔다는 것으로 조금은 자위를 삼을 수 있을까. 나도 남의 선생이 되어 한 학교를 책임지고 있고, 글이라고 조금 쓴다면서 수필집 한 권 낸 것으로 그 때 내 다짐의 일부나마 이룬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반거들충이밖에 되지 않은 것 같아 선생님께도 스스로에게도 부끄럽기만 하다.

박명조의 '풍경'(연대미상, 종이에 수채,35.0x50.0cm)어느 절의 산문(山門)을 그린 듯한 선생님의 '풍경'이라는 그림을 본다. 꼿꼿하고 엄숙하게 서 있는 산문은 선생님의 엄격하신 모습 같다. 주변의 굽휘어 늘어진 나뭇가지며 다감하게 어우러진 숲의 분위기는 선생님의 온화한 속내 같다. 다시 한 번 선생님의 모습이 머리 속을 채운다. '엄숙'과 '온화'는 교육과 예술에 모두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숙'은 그 바른 정신을 추구하게 하고, '온화'는 그 정신을 모든 것에게로 스미게 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예술과 교육은 하나의 근본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선생님의 '풍경'은 그것들을 모두 갖추신 예술가요 교육자이셨던 선생님의 모습 같다. 남의 선생이요, 예술애호가라며 살고 있는 나는 그 '엄숙'과 '온화'를 얼마나 갖추고 있는가.

전시장에는 단아한 차림의 노신사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젊은이의 부축을 받으며 이인성의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그 사람 너무 일찍 갔어."하며 혼잣말을 하더니 "어, 여기 서동진도 있고 박명조도 있네!" 하면서 반색을 한다. 그들과 생전에 교분이 있었던 분 같다.

그 노신사는 이인성 특별전에서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200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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