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고장에 대하여

이청산 2026. 2. 16. 12:34

고장에 대하여

 

  세월은 나를 저물녘 황혼빛 속에서 홀로 고적을 안고 살아가게 만들어 놓았다.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병마를 불러들여 안겨 혼자서는 생존도 생활도 제대로 건사하기 힘들게도 했다. 세월은 그렇게 해찰을 부리지만, 세상은 그리 무정하지 않았다.

  내 무슨 복덕을 지은 것도 없는데, 마치 설화 속 이야기처럼 어디서 고마운 분을 나에게로 보내주었다. 그분은 아침 한때 잠시 나를 보살펴 줄 뿐이지만, 생존의 고단을 풀어주고, 생활의 적막을 달래주기 위해 따뜻한 마음을 다해 주고 있다.

  세월을 다시 돌아본다. 세월은 몸도 마음도, 그 몸과 마음을 의지하고 있는 주위의 모든 것도 이냥 그대로 두는 법이 없다. 모든 것을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도 하지만, 또 모든 것을 허물고 없애버리기도 한다. 그게 세월의 속성이던가.

  그 세월 따라 세상 빛을 오래 쬐며 살수록 새로 무엇이 생겨나고 새로워지기보다는, 낡아 헤지고, 고장이 나 못 쓰게 되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내 몸부터 그렇지 않은가. 성하던 기력이며 근력은 다 어디로 가고, 어디 한 곳도 온전한 데가 없는 것 같게 했다.

  쓰는 물건인들 성한 게 있으랴. 늘 써 오던 것이니까 쓰고 있을 뿐, 무엇인들 새것만 하랴. 그렇게 쓰다가 쓰기에 불편해지거나 못 쓰게 되면, 고쳐 쓰거나 버리는 수밖에 없다. 오래 손때가 묻은 것이라 애착이 없지 아니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느 날 나를 도와주는 분이 전기 포트 스위치 부분이 잘 작동되지 않는다며, 주방에서 쓰고 있는 여러 가지 집기가 모두 너무 오래된 것 같다 했다. 오래 살다 보니, 오래된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웬만한 것은 버려야 하지 않겠냐 했다. 버려야 할 것이 그것들뿐이랴.

  어디 한번 보기나 하자 하고 포트를 살펴보니, 전원을 켜고 끄기가 제대로 잘 안 움직이고 있었다. 이리저리 만져 봐도 여전히 잘되지 않았다. 에멜무지로 기름이나 한번 쳐보자 하고, 스프레이 윤활유를 조금 뿌렸더니 제대로 작동되었다.

  내 워낙 기계치라 그 부분이 어떻게 되어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동하는 부분에 녹이 슬거나 접촉이 원활하지 못해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사람도 나이가 많아질수록 관절 부분에 가장 먼저 이상이 생기는 것에 견주어 볼 수 있을까.

  내 심신을 다시 돌아본다. 마음도 몸도 짧지 않은 시간을 잠시도 멈춤 없이 끈질기게 써왔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기억의 주머니가 아니던가. 희로애락 호오 애증의 온갖 기억들이 얼마나 많이 들락거렸던가. 어떤 것들은 저 깊은 바닥에 더께처럼 가라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기억들 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욕심에 차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는 사이에 마음을 얼마나 피곤하고 상처받게 했던가. 그러니 그 마음인들 얼마나 지쳐 있으랴. 고장이 날 만도 하겠다. 그 대가로 이 적막 속을 유형流刑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몸인들 온전하랴. 몸 여러 기관을 얼마나 부리고 혹사해 왔던가. 팔다리는 물론 내장 기관 하나하나 잠시도 쉴 겨를 없이 온갖 노동에 시달려 왔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어디 성한 곳이 있겠는가. 무엇이 젊은 시절 같으랴.

  급기야는 사는 일을 두고 혼자서 무얼 해내기가 힘든 처지가 되어 고마운 분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이르지 않았는가. 하루 잠시의 도움으로 온 하루를 살고 있지만, 그 도움이 나에게는 몸에도 마음에도 생광한 윤활유가 되고 있다.

  윤활유가 영원한 치유는 될 수 없을지라도, 망가져 못 쓰게 되기 전까지는 잘 돌아가게 해주는 고마운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고장과 윤활유는 뗄 수 없는 필연적, 필수적 관계하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래 써도 고장이 잘 나지 않는 게 없지는 않다. 책이다. 아무리 오래 두고 보아도 다칠 일이 별로 없다. 오래 두고 볼수록 더욱 찬연한 빛을 내뿜는 책도 있다. 그런 책조차도 세월이 흐르다 보면 내용이나 모양이 바랠 수도 있고, 쌓이다 보면 애물단지가 되기도 한다.

  영원히 볼 수 있고, 오래도록 지닐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으랴. 흔히들, 무엇을 누구를 향한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바람일 뿐, 그것도 고장이 잘 나서 그로 인해 속 깊은 눈물을 뿌리기도 해야 한다. 그 눈물이 때로는 심신을 다치게도 한다.

  사랑은 뿌리치고 싶지 않아도 가버릴 수 있지만, 고장은 뿌리치고 싶어도 온다. 사랑을 잘 다스려 오래 간직하고 싶듯, 고장을 잘 다스려 내 쓰고 싶은 걸 오래 쓸 수 있도록 할 일이다. 사랑을 잘 보듬고 싶듯, 고장도 잘 보듬으며 살 일이다. 윤활유를 적절히 쳐줄 일이다.

  고마운 분은 내일 아침에 또 내 고장 난 심신에 윤활유를 치러 올 것이다. 윤활유 친 포트에 전원을 다시 넣어본다. 물이 잘 끓는다.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2026.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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