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이경종 선생의 바다

이청산 2026. 1. 28. 20:20

이경종 선생의 바다

 

  “……집채 같은 파도가 손바닥만 한 배를 덮치는 순간 배는 맥없이 기우뚱했고 56명의 승객은 ‘아!’ 하고 비명과 함께 차가운 바닷속으로 던져졌다. ‘살려줘요!’ 하는 절규와 함께 허우적거리던 어린이, 부녀자들이 순식간에 파도 속에 묻혔다. 배는 산산조각이 나고 시체는 영하 5도의 차가운 바다 위에 떠올랐다. 마중 나왔던 가족들은 빤히 보이는 참변 모습에 발을 동동 구르며 통곡했다.……”

  1976년 1월 17일 울릉도 북쪽 천부항에서 만덕호가 참혹하게 침몰하는 모습을 신문 기사(1976.1.19. 동아일보)는 이렇게 시작했다. 결국, 그 배에 타고 있던 37명은 시체로 떠 오르거나 영원한 실종자가 되어 바다의 혼이 되어야 했고, 19명만이 살아나올 수 있었다.

  그 배에 천부초등 6학년 담임과 경리를 담당하고 있던 이경종李景宗 선생이 타고 있었다. 선생은 전날 수업을 마친 오후, 직원 봉급 수령을 위해 눈 쌓인 산길 몇 시간 걸어 소재지 도동으로 왔다. 저문 날을 하숙에서 새우고, 이튿날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려는 두 제자의 어렵게 마련한 입학금을 납부하고, 15명 직원 1월 급료 155만여 원을 수령했다.

다시 눈 속 산길을 걸어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배편을 알아보니, 마침 어선 만덕호가 천부로 간다 했다. 정원 20명 7.2t 목선으로 조그만 고깃배였다. 그것도 귀한 배편이라 타려는 사람도, 실을 짐도 많았다. 철근 1.7톤t, 정부미 10포대, 라면 15상자에 승객 20여 명을 태우고, 경찰의 검문이 끝나고 30여 명을 더 태웠다.

  저동항을 지나 선창 앞바다에 이르자 삼선암 너머에서 하얀 갈퀴를 세운 난파도가 무섭게 몰아쳤다. 배가 심하게 요동했다. 천부항 앞에 이르자 바람은 북동풍으로 돌변하며 더욱 거세졌다. 몰아치는 노도가 바위에 부딪히면서 천파만파 물기둥을 치솟게 했다. 입항에 실패한 배는 일단 후퇴하여 거센 파도를 피하려 했지만, 배가 심하게 요동치는 바람에 뒤 갑판 위에 사려둔 밧줄이 스크루에 휘감기면서 시동이 꺼져버렸다.

  다시 성난 파도가 빠른 속도로 뱃전을 치며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물 폭발이 덮쳤다. 폭발이 가라앉자 배는 바닷속으로 무참히 빠져들었다. 사람과 짐이 한꺼번에 바닷속으로 쏟아지면서 천부항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학창 시절 수영 선수였던 선생은 기민한 동작으로 파도를 헤쳤다. 마침 물 위에 뜬 승강용 목판(길이 5m, 넓이 40cm, 두께 5㎝)을 잡을 수가 있었다. 뭍을 향해 나아가려던 찰라. 좀 떨어진 곳에서 제자 최병춘 군과 신현진 군이 탈진 상태로 허우적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재빨리 물을 헤치며 한 명씩 가까스로 끌어당겨 목판을 붙잡게 하고, 이 아이들과 함께 몰아치는 파도와 사투를 벌였다. 

뭍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은 주먹을 부르쥐거나 발을 구를 뿐이었다. 북면 지서의 순경이 달려와 사건을 전파하고, 부근에 있던 배가 달려와 선장 등 3명을 구조하는 데 다시 파도가 휘몰아쳐 행정선과 경비정이 달려와도 접근할 수 없었다. 파도 잦아들어 바다가 잠잠해졌을 때는 깨어진 배 조각만 떠다닐 뿐, 선생도 아이들도 다른 삼십여 명의 목숨도 흔적이 가뭇했다.

  험한 파도를 막아내지 못한 열악한 항구 조건, 정원을 초과한 승선 인원, 화물 과적 등이 사고 원인으로 지적되었지만, 원인 규명이 죽은 목숨을 살아오게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한목숨 기꺼이 받쳐 제자들과 함께 죽어간 선생도 살릴 수는 없었다. 선생의 모습은 거룩한 죽음을 기려 수여된 상과 훈장으로, 몸담았던 교정에 세워진 순직비로 남았을 뿐이었다.

  1941년 6월 23일 대구 노곡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8월 31일 영천 지곡국민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은 이래, 군 복무 기간 1년 말고는 줄곧 영천 관내 초등학교에서 봉직하다가 낙도 울릉도 근무를 자원했다.   1973년 3월 1일 천부국민학교에 부임하여 1976년 순직하기까지 35년의 길지 않은 삶과 15년 3개월의 짧지 않은 교직 생애를 장렬하게 바쳤다.

  뭍의 교사가 섬 학교 근무를 자원할 때는 더욱 창창한 교직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인 것은 물론이다. 그 꿈도 성실하지 않으면 몽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날도 아이들 입학금 납부며 공무 수행을 위한 출장 중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언제나 온후하여 아이들 사랑도 지극했고, 학교 곳곳을 꽃밭으로 만드는 일에도 열성을 기울인 선생님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바로 이 세상에 피어난 한 떨기 꽃이었는지도 모른다.

  제자의 명재경각 위기 앞에서, 미래의 꿈 같은 건 떠올릴 겨를도 없고, 천년포 해안으로 달려와 그의 주검을 앞에 두고 피 울음으로 통곡할 부인의 모습도 전혀 머릿속에 그릴 수가 없었다. 오직 저 아이들을 살리는 일 말고 무엇을 생각에 둘 수 있었으랴. ‘생각’이 아니라 찰라적 본능이었다. 그 고결한 본능을 파도가, 바다가 삼킨 것이다.

  선생이 몸을 던진 바다는 선생이 일군 아름다운 사랑의 꽃밭이 되었고, 폭발한 파도는 선생의 사랑이 폭발한 것이었다. 선생의 사랑은 바다에만 꽃이 되지 않았다. 섬의 일주도로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마침내 1979년부터 여객 버스가 다니는 계기가 되게도 했다. 그 사랑이 뭍에서도, 뭍의 모든 사람에게도 꽃을 피운 것이다.

  그의 고결한 죽음 50주기를 기려 제정한 「이경종 스승상」을 처음으로 수여하는 2026년, 울릉도는 파도 걱정 없이 섬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일주 버스가 그의 숭고한 희생을 안고, 그 사람 사랑의 높은 뜻을 싣고 섬을 경쾌하게 달리고 있었다.

  이경종 선생의 바다는 사랑의 바다였다. 섬 모든 곳에 사랑의 꽃을 피워준 바다였다. 세상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인간애의 뜨거운 마음을 꽃피게 해준 바다였다. ♣(2026.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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