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산바람 강바람과 안성기

이청산 2026. 1. 12. 11:29

산바람 강바람과 안성기

 

  안성기 배우가 향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영화에 문외한이 되어버린 지 오래되어 영화에 관해서는 관심도 지식도 별로 없지만, 배우 ‘안성기’ 하면 꼭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어느 영화에선가 그가 「산바람 강바람」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내가 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이었으니 60년도 훨씬 더 전이다. 어느 조그마한 극장에서 흑백 영화로 본 기억이 아련한데, 안성기 말고는 영화 제목도, 출연 배우도, 줄거리도 다 잊어버렸다. 그 장면 하나만 남아 안성기 이름만 나오면 그 장면이 떠올랐다.

  다른 장면이며 줄거리가 기억 안 나면, 노래 그대로 산을 뛰어다니거나 강물을 쫓아다니며 노는 장면 속에서 부른 노래였을까, 그런 청량하고 순정한 장면들을 마음대로 상상하며 어린이 배우 안성기와 그가 부른 노래를 떠올리곤 했다.

그 영화 속에서 안성기를 만났을 때 안성기보다 내가 몇 학년 높았을 것 같았지만, 또래 같은 생각이 들면서 어쩌면 그리 똑똑하고 잘 생겼을까,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 기억과 더불어 나도 안성기도 황혼의 나이가 되는 세월이 훌쩍 흘러갔다.

  그 기억 속의 안성기가 작고했다고 하니 어린 시절 본 그 「산바람 강바람」의 장면이 다시 떠오르면서, 내가 무슨 영화, 어떤 장면 속에서 그를 봤을까 하는 게 무척 궁금했다. 웹 사이트에 관련될 만한 검색어를 넣어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제미나이Gemini를 실행하여 ‘안성기 배우가 출연하여 「산바람 강바람」이라는 노래를 불렀던 영화가 어떤 작품이었는지 알려 달라.’고 AI에게 청했더니, 1960년에 나온 「하녀」라는 영화라고 재깍 알려 준다. 과연 AI다. 그때 같으면 내가 초등학교 졸업반 무렵이다.

  내친김에 줄거리와 그 노래가 불린 장면도 좀 알려 달라 했다. 그걸 알 수 있으면 내 기억도 살아날까 싶어서다. AI는 잠시도 망설임 없이 원하는 걸 척척 알려주었다. 호기심과 설렘으로 AI가 해주는 말을 열심히 듣고 읽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줄거리의 대략은 이러했다.

  “작곡가이자 어느 방직공장 음악 선생님인 동식(김진규 분)은 아내와 아들 창순, 딸을 데리고 이 층 양옥집으로 이사를 했다. 아내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밤낮으로 재봉틀 일을 하며 몸이 허약해져 있었다. 아내의 건강이 걱정된 동식은 공장 학생 소개로 한 하녀를 집으로 들인다. 이 하녀는 처음부터 어딘지 모르게 기괴하고 대담한 행동을 보이며 집안의 분위기를 묘하게 바꾼다.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밤, 하녀는 동식을 유혹하여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하녀를 설득해 아이를 유산시킨다. 자신의 아이를 잃은 하녀는 광기에 사로잡혀 가족을 위협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동식의 아들 창순(안성기 분)을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려 다리를 다치게 하는 등 잔혹한 복수를 감행하며 집안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결국, 하녀는 동식과 함께 쥐약을 먹고 동반 자살을 시도한다. 동식은 마지막 순간에 아내의 곁으로 기어와 숨을 거두며, 영화는 관객에게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경고' 혹은 '상상'일 수도 있다는 묘한 여운을 남기며 끝이 난다.”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그런 서정적인 노래를 불렀다니! AI는 또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하녀에 의해 다리를 다친 창순이 계단을 힘들게 오르내리며 동요 「산바람 강바람」을 흥얼거리는데, ​하녀는 위층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창순을 내려다보고 있고, 창순은 아무것도 모른 채 노래를 부른다. ​이때 흐르는 동요는 평화로운 가사와 달리, 곧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스릴러적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쓰였다.”라고 했다.

  끔찍한 이야기다. 그 노래가 그런 장치로 쓰였다니! 그런데 왜 내 기억 속에는 그러한 사건이며 분위기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안성기의 그 천진한 노래만 여태껏 남아 온 걸까. ‘미성년자 관람 불가’로 판정되었을지도 모르는 그 영화를 내가 어찌 볼 수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불가佛家에서는, 생각은 인연이 되었을 때만 일어난다고 하며 이를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스릴러적’ 분위기는 내가 어려 이해를 못 했거나 받아들이지 못해 내 기억으로 남지 않고, 오직 안성기 배우의 그 노래와만 내가 인연을 맺었단 말인가.

  그 영화의 이야기며 그 속의 사건이 그런 끔찍한 것이었다면 내 기억에 남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 모르겠다. 이처럼 세상 모든 일을 두고 인연을 맺고 싶은 것만 맺어 기억으로 남기고 싶은 것만 남기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편안할까.

  그런데 우리는, 기억 때문에 기쁘고 가벼운 마음,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도 가지게 되기도 하지만, 또 기억 때문에 슬픔, 괴로움, 우울함, 미움 같은 감정을 안고 가야 할 일도 얼마나 많은가.

  지금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하게 그 노래를 부르던 창순(안성기)의 모습만을 내 기억 속에 담아 두고 싶다. 친절한 AI가 내 궁금증을 풀어준 건 고맙지만, 그 끔찍한 사건들 때문에 어린 안성기의 그 무구한 모습에 대한 기억에 흠이 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다행히 안성기 배우는 인기인이면 으레 따라다니기 마련인 가십거리 하나 남기지 않고, 곁눈 팔지 않고 오직 영화만을 위한 영화예술인으로 살다 갔다고 한다. 그 노래 그대로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이 되어 관객들의 땀과 눈물을 씻어 주다가 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산바람 강바람」과 안성기를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다.♣(20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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