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땅에 대한 사랑으로

이청산 2022. 8. 1. 15:27

땅에 대한 사랑으로

   회관 대회의실에 모여 앉은 회원들과 면민들의 눈과 귀가 모두 나에게로 모여 오고 있었다. 국민의례에 이어 회장께서 발간사를

말씀하고, 시의회 의장, 면장께서 축사했다. 이어 사회자의 소개를 받아 등장한 나는, 이곳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이라 했다. 17년 전 이곳으로 공직 발령을 받아 근무하게 된 것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했다. 다른 곳을 거쳐 정년퇴직하면서 다시 여기를 찾아와 이 땅 사람이 되어 살고 있다 했다. 모두 박수를 보냈다.

‘마성문화진흥회’라는 모임이 있다. 다른 곳의 발전한 문화도 부지런히 살피면서 지역의 문화 발전에 이바지해 보려 하는 순수 민간 문화 운동 단체다. 그런 일을 해 온 세월이 10년을 넘어섰다. 앞으로의 일을 더 알차게 해나가기 위해서라도 지나온 일들을 정리해 보자 했다. 어쩌다 보니 그 정리의 일을 내가 맡아 『마성문화진흥회 10년사』라는 조그만 책자를 엮어내게 되었다.

  오늘 그 책의 출판기념회를 열면서 그와 관련하여 내가 강연을 하기로 했다. 이야기 주제는 「마성 문화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다. 내가 이곳에 오래 살지도 않았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외람되기도 하지만, 오래 살지 않았기에 선입견에 치우치지 않고 말씀드릴 수 있음을 이해해 달라 했다.

우선 지역 역사의 대강을 살피면서, 역사란 문화를 담는 그릇으로 문화가 축적된 것이 역사라 했다. 그것이 곧 새로운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 되는 것임을 말하며, 지역의 상징적 사적이라 할 수 있는 고모산성을 비롯하여 열여덟 개 마을에 산재해 있는 동제洞祭 유적 등 여러 문화재를 답사 영상을 통해 살펴보았다. 이들 중 많은 것이 곧 사라져 갈 것임을 염려하면서 역사란 안 지키면 없어지고, 역사가 없으면 새로운 문화 창조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 지역이 영남대로의 중요한 길목인데 그 길의 자취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이며, 나라 산업화에 크게 이바지했던 탄광의 역사가 보존되지 않은 건 역사 보존 의식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냐고 물으며, ‘마성문화진흥회’ 10년밖에 안 된 역사지만 그 자취를 펴내는 건 역사의식을 새롭게 가다듬자는데 의의가 있다고 했다.

  우리말 ‘잘살다’와 ‘잘 살다’는 차이가 있는 말이라 하면서, 전자는 부유하게 사는 걸 말하고, 후자는 행복하게 사는 걸 말한다고 풀이했다. 부유하다는 것은 물질적 가치, 실용적 가치 위주로 사는 것이지만, 행복하게 사는 건 정신적인 가지, 정서적인 가치를 존중할 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며, 문화적인 생활이 그 가치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 가치를 바라며 우리 ‘마성문화진흥회’에서는 선진 문물의 섭취를 위해 그동안 수십 회에 걸친 문화 답사를 하고, 여러 가지 역사 문화 자료집이며 계도서를 편찬하고, 향토 출신의 대학교수 등 자원 인사를 초빙하여 강연회도 개최하고, 택호패宅號牌를 만들어 주소패 아래 달아주어 이웃 간의 소통을 잘할 수 있게 해주고, 사라져가는 옛 지명을 찾아내어 지명도를 만들어 향토의 얼을 살리고자 하였다고 했다.

  청중들은 점점 더 눈과 귀를 깊게 모아가는 듯했다. 그 바람에는 나는 신이 나서 아는 것, 준비한 것을 모두 쏟아내려 애썼다. 사회자가 시계를 가리키며 눈짓을 했다. 아차, 내가 너무 도취하여 시간 가는 줄 몰랐구나. 청중들은 왜 내색을 안 할까. 사회자가 그렇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면 나도 모를 시간의 수렁 속으로 빠질 뻔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겠다며, 지난겨울 의성의 어느 마을에서 우리 진흥회가 한 일에 대해 견학을 왔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우리 지역의 문화에도 발전 희망은 있다고 했다. 그 희망을 내다보며 문화의 왕성한 소비와 생산을 위해 아름다운 곳, 유서 깊은 곳을 찾아다니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유형, 무형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일에도 열정을 다 바치겠다 했다. 그렇게 향토 문화 발전을 위해 애쓰는 사람을 보면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말아 달라 했다.

이곳이 향토도 아닌 내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사는 땅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는 걸 깊이 이해해주면 감사하겠다 했다. 어디 살든 나는 내가 몸 붙이고 있는 땅을 사랑할 것이라 했다. 박수 소리와 함께 한 시간 사십 분 정도의 짧지 않은 시간에 걸친 내 이야기가 모두 끝났다. 출판기념 떡을 자르고.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모든 순서가 끝났다. 달려 나와 악수를 청하는 사람, 명함을 달라고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모두 헤어졌다.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공감을 깊이 해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인 사람에게든 ‘사는 땅에 대한 사랑’이라는 내 생각과 마음은 달라질 게 없다.

  ‘토포필리아(Topophilia)’라는 말이 있다. 희랍어로 장소를 뜻하는 ‘토포(Topo)’와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philia)’가 합쳐진 말로 ‘장소애場所愛’로 번역되는 말이다. 명절이면 고향 땅을 찾아가고 싶은 그 마음, 그 사랑이다. 고향은 아닐지라도 김소월이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하듯, 살고 싶은 땅, 사는 땅을 향한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곧 장소 사랑이다.

  오늘 나의 강연은 그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내 사랑하는 땅에 대한 고백이다. 나와 같은 땅에 사는 사람은 모두 나의 그 고백을 받은 셈이다. 연인 사이에도 그렇듯 그 고백을 받아 주고 안 받아 주고는 받는 이의 마음이다. 모두 나의 고백을 잘 받아 주었으리라 믿고 싶다. 그리하여 우리 ‘마성문화진흥회’에 더 많은 지역민과 대를 이어갈 더욱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참여해 주기를 빌며 회관을 나선다.

  흰 구름 떠가는 푸른 하늘에는 아직도 서산마루를 멀찍이 두고 있는 해가 찬연한 빛을 내고 있다.♣(202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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