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허상의 글쓰기

이청산 2022. 7. 23. 20:23

허상의 글쓰기

 

이  일  배

 

  1990년대 미국에서 무분별한 개벌皆伐에 반대하여 거세게 일어났던 ‘목재 전쟁’이라는 환경 운동을 다시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자 리처드 파워스가 그것을 소재로 하여 쓴 소설 『오버스토리(The Over Story)』가 나오고, 그것을 인용한 내 수필 ‘나무의 살 자리’도 떴다.

  또 하나의 글이 떠서 『오버스토리』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신기하다 싶어 그 글을 클릭하여 들어가 보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내 글이 그대로 실려 있지 않은가. ㅎ 아무개가 썼다는 ‘나무를 보다’라는 글에-.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 아늑하다. 산을 오르기 전까지의 어지럽고 성가셨던 일들이, 산에만 들면 맑은 물로 가셔낸 듯 말끔히 씻긴다.…….”라고 시작하는 첫 문단에서 첫 문장만 ‘오랜만에 산을 오른다.’로 바꾸어 놓았을 뿐 다른 부분은 글자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전편에 걸쳐 자기 문장이라고 넣은 건 “아쉬운 것이 또 있다면 우리가 사는 제주 땅에 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 소나무가……”라고 한 두어 문장뿐인데, 이마저도 전체 주제와는 맞지도 않고, 나머지는 모든 문장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이런 글을 늠름히 실어놓은 곳은 어떤 사이트일까. 경로를 따라가 그 사이트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 수필계의 아주 유력한 수필 월간지에서 배출한 수필 작가 단체의 카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이태 전에 그 월간지에서 신인상을 받은 사람으로 어느 달의 그 책에 그 글이 실려 있다고 했다. 편집자가 글의 표절을 밝혀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 사람은 자기 글도 아닌 걸 그 유력지에 기고하는 용기를 어떻게 내었을까. 그 글은 어느 대학교수가 운영하는 수필교실 사이트에도 버젓이 옮겨져 있었다.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글을 도용당했다는 사실도 참기 어렵지만, 모든 선량한 문인과 우리 문학계를 위해서도 그대로 넘길 수 없었다. 그 카페에 ‘작품 표절을 고발합니다’라며 항의 글을 올리면서 ‘게시자와 필자께서 해명과 사과가 있기를 촉구’했다. 몇 시간 뒤에 글의 게시자는 ‘빠른 시일 내에 본사와 작가, 카페지기의 입장을 발표하겠습니다.’는 게시문을 올리며, 나에게 ‘양해를 구한다’는 말과 함께 그 표절 글도, 나의 항의 글도 모두 삭제했다.

  그 필자도 연락을 받았던지 “……마감 시간은 바쁘고 해서 선생님 글을 보고 하였습니다.……”며 짧은 사과문을 보내왔다. 내 글을 보고,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말인가. 헛웃음이 나왔다. 게시자인 카페지기는 “……화가 많이 나시고 어이없는 상황이지만 부디 선생님의 넓으신 아량으로 며칠 기다려주시면 공식 입장을 전달하겠습니다.……”라는 메일을 보냈다. 며칠 뒤 작가회 회장이라는 분이 정중하게 유감을 표한다면서, 징계위원회를 소집하여 중대 사안을 처리할 계획이라며 알려왔다. 마침 어느 정당의 대표가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때였다.

  한참 동안 누구도 아무 말이 없었다. 한 열흘쯤 지난 뒤 정당 대표의 징계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에 표절 사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싶어 작가회 카페에 들어가 보니, 징계 회의를 열어 만장일치로 ‘회원 자격 박탈’을 결정했다며 공지를 올려놓았다.

회장에게 전화하여 회원들에게는 공지하면서 나에게는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시냐 했더니, 회사에서 입장 표명이 있을 거라 했다. 문득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싶다 했다. 내 글이 실린 수필집과 표절 글이 실린 책이나 서로 주고받아 참고로 삼자 했다.

  그 사람은 왜 그리 끔찍한(?) 짓을 했을까. 그러고도 마음이 편했을까. 영원히 자기 글이 될 것이라 믿었을까?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 검색하다 보니, 그가 신인상을 받으면서 어느 지역 신문과 인터뷰한 기사가 보였다.

  남들이 글을 써서 신문에 얼굴 사진과 이름이 함께 실린 것을 보며 상당히 부러웠다고 한다. 자기도 무슨 글을 써서 어느 신문사에 사진과 함께 보냈더니 며칠 뒤에 글과 함께 얼굴이며 이름 석 자가 나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글을 열심히 써서 상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글을 쓰는 목적은 오직 이름을 내는 것에 있다는 것이 된다. 이름을 내기 위해 열심히 쓰다 보니 작가도 되었다는 말이다. 글을 통해 나타내보고 싶은 인생관이며 세계관이야 어떻게 되든 이름만 낼 수 있으면 되는 것일까. 그래서 남의 글이라도 슬쩍해다가 자기 이름을 얹어 세상에 내놓았던 것일까.

  그가 가져간 나의 글 ‘나무의 살 자리’ 속에 가로수와 정원수의 불행을 이야기한 부분이 있다. 그 불행은 ‘나무의 살 자리를 빼앗아 제 살 자리에 갖다 놓고 행복해’ 하는 인간들의 탐욕 때문이라 했다. 그도 내 글을 슬쩍 제 글 자리에 갖다 놓고서 이름이 난 것을 행복해했을 것이다. 그런 내용의 글을 보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을까.

  글을 쓰는 일이란 결코 매명賣名이나 현명顯名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진실한 삶의 모습을 드러내어, 그 진실이 독자들에게 얼마나 감동을 줄 수 있는가에 글의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 글의 본질이 아닌, 이름이라는 허상虛像에 매달려 글을 써 온 것 같다. 허상의 글쓰기를 해 왔다고 할까.

  글 쓰는 이는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얼마나 본질에 충실한 글을 쓰고 있는가. 얼마나 진실의 감동을 쓰고 있는가. 허상이 아닌 실상의 글쓰기를 하고 있는가. 그로 하여 실상의 글쓰기를 다시 한번 돌아본다.♣(2022.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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