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동병상련의 꿈

이청산 2022. 6. 25. 15:59

동병상련의 꿈

이  일  배

 

  교재를 들고 수업할 교실을 찾아가는데 아무리 찾아도 교실이 보이지 않는다. 가파른 층계도 있고 언덕도 나오고 벼랑과도 맞서며 애써 헤쳐나가도 찾는 교실이 안 나타난다. 안간힘을 쓰며 헤매다가 눈을 뜨니 꿈이다. 간혹 그런 꿈을 꾼다.

  프로이트의 말대로 ‘꿈은 소망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내가 그만큼 교실에 들어 아이들과 더불어 수업을 함께하는 간절히 그리면서 산다는 말인가. 지금은 기억도 아련할 만큼 잊고 지내고 있는데, 왜 그런 일이 꿈으로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비슷한 꿈들을 나만 꾸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수필가도 말한다.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들어갈 반 출석부가 없어 계속 찾아 헤매다가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찾았지만, 들어갈 학급이 없어 2, 3층을 오르내리다가 진땀을 흘리다 깼다고 했다. (『한국수필』 2022.4, 진혜영, 「늘 그 속에 머물다」)

  또 누구는 꿈에서, 건물 여기저기로 허덕이며 급하게 달리고 위아래 계단을 오르내려 보지만 찾는 교실은 도무지 나타나지 않아 조바심만 증폭되고, 수업 시작종이 울린 지도 한참이 지났는데 출석부와 교재를 들고 계속 교실을 찾아 헤맸다고 했다. (『한국수필』 2022.6. 정봉구, 「꿈과 꿈」)

  동직을 살다가 비슷한 시기에 함께 은퇴한 친구에게서도 이 비슷한 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교직 생활을 한 사람이면 누구나 꿈직한 꿈인지도 모르겠다. 왜 이런 꿈들을 꾸는 것일까.

  교사가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수업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기쁘고 즐겁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볍게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가 모두 만족하게 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업에 대한 중압감이 강박관념으로 굳어져 꿈으로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교실을 못 찾아 헤매는 것은 교실에 꼭 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의 다른 표현이요, 결국 못 찾고 마는 것은 잘해야 한다는 강박한 상념의 역설적 발현일 수도 있다.

  교단을 내려선 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꿈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만큼 무의식 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원한 낙인처럼 남아 두고두고 꿈의 소재가 될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교단생활 내내 수업의 부담감 속을 살아왔다. 하루에 몇 시간을 두고 목청을 세워야 하는 것도 힘들지만, 만족감이 들지 않는 수업 후의 개운치 못한 느낌이 더욱 힘들게 했던 것 같다.

  모르긴 하되, 교직을 산 다른 이들도 그런 세월을 살지 않았을까. 수업마다 쉽고 즐겁게 하고, 흡족해하며 교실을 나서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비슷한 꿈 이야기들에서 동병상련의 정이 느껴진다.

  그렇게 힘든 세월을 살다가 관리자가 되어 이제 수업의 그런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싶었는데, 관리자 생활이란 그것대로 또한 어려움이 없지 않다. 일이며 사람을 관리하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드디어 퇴임 날이 다가왔다. 모든 것을 훌훌 벗어 버리고 싶었다. 산 깊고 물 맑은 한촌에 조그만 집을 지었다. 퇴임하면서 바로 봇짐을 지고 와 그 누옥에 들었다. 날마다 바람 소리 새소리 들으며 세상을 잊어갔다.

  걸릴 게 없었다. 날이 새면 눈을 뜨고, 날이 밝으면 산을 오르고 나무를 안았다. 강둑을 걸으며 물소리를 듣고 물에 잠긴 하늘과 함께 놀았다. 지난날의 희로애락이 푸른 나무, 맑은 물에 다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꿈은 그 시절에 그대로 머물고 있을 적이 많다.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며 고뇌에 젖던 일, 동료들과 일에 울고 웃으며 번뇌 속을 헤매던 일들이 가끔씩 꿈으로 나타난다. 교실을 못 찾던 일도 그중 하나다.

  요즈음 들어 꿈이 더욱 많이 꾸어진다. 쌓여 가는 연륜이 삶의 일들을 늘어나게 하기 때문일까. 그 꿈들이 깊은 잠을 못 이루게 하면서 깨면 다 지워져 버린다. 다몽증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교실을 찾아 헤매던 꿈은 금시인 듯 선명히 떠오른다. 예전에 교실 드는 일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의 짐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꿈을 꾸는 다른 이들은 어떻게 느낄까. 다시 한번 동병상련이 솟는다.

  이 굴레 같은 꿈을 어찌해야 할까.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을 것 같다. 꿈과 친하는 일이다. 교단을 내려 물러나 있듯, 세상에서 비켜나 한촌을 살고 있듯, 꿈도 한 발짝 물러서서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바라볼 수는 없을까.

  그러다 보면, 조금은 긴장감도 주는 그 꿈을 오히려 재미있게 꿀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시절도 있었거니 하며, 찾다 찾다 못 찾은 길은 내일 또 찾으면 되리라 하고 느긋이 바라보고 싶다. 마음 일은 마음으로 풀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오늘 밤도 어디의 누구와 함께 동병의 그 꿈길을 헤맬지도 모른다. 상련의 동지들과 그 드라마 함께 보며 지나온 삶의 한 장면으로 담담히 새기고 싶다. 동병상련의 그 꿈길 속으로 가붓이 들고 싶다.

  그러면 꿈도 편안해질까. ♣(2022.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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