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선물

이청산 2022. 5. 24. 15:22

선물

 

이  일  배

 

  윤 박사가 스승의 날을 기리는 전화를 했다. 사십오 년 전쯤의 제자다. 그도 이순을 벌써 넘어선 연치를 살고 있다. 일찍이 해외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지금까지 사회와 나라를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해오고 있다. 

  내가 정년으로 교단을 내려온 지도 어느덧 십여 년이 흘렀다. 현직에 있을 때도 그리 우러름을 받는 사람은 못 되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새겨주는 사람도 차츰 줄어들어 이제는 기억해 줄 제자도 몇 되지 않을 것 같다.

  나를 돌아볼 일일지언정 누구를 탓할 일은 전혀 아니다. 어쩌면 그렇게 세월 속에 묻혀 가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서도 윤 박사는 여태 나를 잊지 않는다. 명절마다 마음을 전해 오는가 하면, 스승의 날에는 꼭 전화라도 해준다.

  고마운 일이다. 내가 저에게 베풀어 준 게 무얼까를 돌이켜보면 그의 성심이 오히려 나를 민망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저물녘을 적요하게 살아가고 있는 내 삶을 한결 따뜻하게 데워 주기도 한다.

  나의 근간 수필집 『나무는 흐른다』를 보고서는 자연과 더불어 살며 구도의 경지에 침잠하는 모습이 우르러 뵌다고 하면서, 은퇴 생활을 아주 뜻깊게 하시는 것 같아 자기도 퇴직하면 뒤따르고 싶다 했다. 제자의 그런 이해도 나에게는 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어찌하다 보니 물러난 삶의 적요를 깨워주는 일이 또 나를 찾아왔다. 교단을 한번 내려서면 다시는 설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시 서고 싶은 마음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하다 몇 해 전부터 어느 도서관에서 평생교육 과정으로 개설한 수필 강좌를 맡게 되었다.

  평생을 두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오고 반평생 글을 써왔다 하지만, 글 쓰는 일에는 늘 자신이 없어 그 일로 남 앞에 서는 일은 상상도 하지 않았는데, 살다 보니 그런 일이 또 생기게 되었다. 짐일까 복일까.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란 어린 학생들도 아니요, 삶의 이런저런 일을 다 겪어 저마다 삶의 연륜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중에는 평생을 두고 공직에 봉사하다가 물러나 은퇴한 삶을 뜻깊게 보내고 싶어 찾아온 분들도 있다.

  연배가 그리 차이 나지 않는 이들도 있어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비등한 삶의 경륜을 스스럼없이 함께 나눌 수 있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가르치고 배우는 자리가 아니라 삶의 담론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리인 것 같아 오히려 기쁘고 즐겁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스승의 날 잔치가 한바탕 벌어졌다.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란 말인가. 정성 깃든 선물들을 건네 오는가 하면, 꽃을 꽂아주고 소리 모아 노래를 부르며 축복해주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여 고맙다는 말조차 옳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으로 뜻으로 주는 여러 가지 선물이 다 감사했지만, 그중 어떤 이는 근래에 낸 내 수필집의 제목과 이름을 새긴 펜을 선사하기도 했다. 어찌 그리 만들었을까. 제목의 서체도 책에 쓰인 그대로를 살려 새겼다. 세상에 하나뿐인 선물인 것 같아 또 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나는 무엇으로 답해야 할까. 내가 행복해서,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이라 했다. 한 주에 한 번씩 여러분들을 만나러 오는 길이 그리 설렐 수가 없다고 했다. 그 행복을 나에게 주셔서 도리어 감사하다 했다. 그것이 내가 늘 받는 감동적인 선물이라 했다.

  사실이 그랬다. 그렇게 함께하는 시간들이 행복했다. 도서관에서 봄가을 학기마다 누리집을 통해 수강생을 모집하는데, 수강 신청이 시작되자마자 오 분도 채 안 되어 정원이 다 차버린다. 글쓰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다는 것도 기쁘지만, 강좌에 대한 호응이 그토록 뜨겁다는 것도 마음을 달게 했다.

  강좌가 열려 수업이 진행되면 모두 부지런히 참여한다. 저마다의 작품을 텍스트로 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작품을 스스럼없이 내어주는 것도 반갑고, 조언에 소곳이 귀 기울여 주는 것도 고맙다. 진지할 때는 더없이 진지하다가 우스울 때는 함께 웃어주는 것이 더할 수 없이 즐겁다.

  내 삶의 경륜이 그리 탐탁지도 않고, 내 문력이 그리 두드러지는 것도 아닌데 모두 하나로 모아주는 그 뜻과 마음이 나에게는 여간 송구한 선물이 아니다. 만날 때마다 이리 느꺼운 선물을 받을진대, 거기에 축화에다 축가까지 받다니-.

  더 열심히 살라는 뜻일 것이다. 문장 앞에 더욱 겸손히 임하라는 격려일 것이다. 더 정겨운 말씀을 달라는 당부일 것이다. 좋은 뜻과 따뜻한 격려와 정감 어린 당부를 받는 것만 해도 얼마나 복된 선물인가.

  오늘도 가방을 들고 나선다. 두 시간여를 달려가는 시간이 그저 기껍기만 하다. 오늘은 무슨 담론으로 그 행복의 선물을 함께 나눌까.

  등에 내리는 햇살이 살갑다. ♣(202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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