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이청산 2022. 4. 21. 13:51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이  일  배

 

  고작 나흘을 머물다 갔다. 올 때도 무슨 혁명을 하듯 불같이 와락 솟더니 실패한 혁명군이 사라지듯 순식간에 가버렸다. 허무하다. 모든 이목을 뒤집을 듯 이 강둑 현란하게 밝힐 땐 언젠데, 이리 속절없이 가버린단 말인가. 

  아침마다 걷는 강둑을 향해 나선다. 지난밤 빗방울이 좀 듣기라도 했는가. 구름이 좀 짙게 드리워지긴 했지만, 엊그저께 피어난 꽃이라 오늘도 찬란하겠지. 한 열흘은 못 버티려고-. 강둑이 가까워진다. 아, 이게 무슨 변고인가. 그 찬연한 꽃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건가.

  십여 년 전 이월 이십육일, 생애의 한 막을 내린 봇짐을 지고 이 마을을 찾아왔다.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둘러싸인 곳에 삼십여 호가 사는 고요한 마을이다. 그 고요에 잠겨 조용히 살고 싶었다. 산 보고 강 보며 나무처럼 물처럼 살리라 했다.

  아직은 겨울의 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을 때였지만, 곧장 들이며 강둑길에는 하얗고 노란 풀꽃들이 피어나고 산에는 노랗고 붉은 꽃들이 피어났다. 그런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나는가 싶더니, 어느 날 강둑에 늘어선 벚나무에서 하얗고 연붉은 꽃잎들을 일시에 활짝 터뜨려냈다. 

  세상에 이런 꽃 대궐이 또 있을까. 길에는 봄까치꽃, 냉이꽃, 꽃다지, 제비꽃, 봄맞이꽃……. 갖가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길가 벚나무에는 꽃이 하늘하늘 하롱하롱 휘날리며 춤을 추고, 들 건넛산에는 산벚꽃이 커다란 봉오리 무덕무덕 온 산을 꽃 천지로 만들고 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모두 꽃이다. 이런 마을에 와 살려 하기를 참 잘했다 싶었다. 살아온 자취 돌아보면 이렇다 하게 잘한 일 별로 보이지 않는데, 이 꽃 마을에 온 건만은 지혜로웠다 싶었다. 꽃만 보고 살아도 몸도 마음도 전혀 고프지 않을 것 같았다.

  철마다 피고 지고 지고 피는 색색의 갖은 꽃들을 보며 하루하루 한 해 한 해를 보내는 일이 환희롭기만 했다. 그중에도 가장 기다려지는 건 역시 봄꽃이었다. 강둑길을 찬연하게 수놓는 벚꽃을 보는 것만 해도 내 한 해는 마냥 희열에 찰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령 그 벚꽃이 져버린다 해도, 철마다 다르게 강둑길을 수놓고 있는 풀꽃들을 보며 다시 오는 해의 벚꽃을 기다리는 마음을 가눌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어느 날, 강둑에 삽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그 많은 풀꽃을 죄다 밀어버렸다.

  풀꽃이 짓이겨진 강둑에 철근을 깔고 회반죽을 들이부었다. 메마른 길이 되고 말았다. 벚나무 아래로 트럭이 다니고 경운기가 털털거렸다. 때로는 할 일 없는 차들이 번쩍이기도 했다. 풀꽃들이란 그저 몇 낱 좁다란 길섶에서나 명줄을 가녀리게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다. 벚나무가 있잖아, 내년에도 벚꽃은 필 거잖아! 내가 이 마을을 잘 살고 있는가, 이 마을에 잘 온 건가 하는 느낌이 들기라도 할 때면 해마다 찬연히 피어나는 벚꽃을 그리며 위안 삼았다. 그때가 되면 아무 데서나 잘 볼 수 없는 거룩한 풍경이 그려지잖아!

  강둑에서 바랄 수 있는 꽃은 오직 벚꽃뿐이었다. 차들이 지나다니는데 거치적거린다며 가지를 다치게라도 할라치면 마치 내 몸에 생채기가 진 것같이 아릿하기도 했다. 자꾸 문명화되어 가는 세상을 어쩌랴 여기면서도 한구석이 비어가는 듯한 마음은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그런 중에도 봄은 오고 벚꽃은 피어났다. 제 몸은 돌보지 않고 꽃을 피워내기만을 오로지하는 나무가 가상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몽우리 몽글몽글하는가 싶더니 어느 날 꽃을 일매지게 활짝 피워내어 온 강둑을 찬연한 꽃 세상으로 만든다.

  내 세상이 온 듯, 나를 위해 저 꽃들이 피어난 듯했다. 혼자 보기 아까워 렌즈에 담아 여기저기 정다운 이에게 보내기도 하고, 가까운 이들을 불러 꽃그늘에 앉아 꽃잎이 뜬 잔을 그윽이 기울이기도 한다. 이 꽃 이대로 영영 가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밤 비바람이 지나간 모양이다. 아침 강둑에 섰을 때, 세상이 온통 무슨 포화라도 맞은 듯 꽃잎이란 꽃잎은 모두 죽은 듯 땅에 널브러져 있었고, 가지에는 붉은 꽃자루만 휑하니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이토록 개벽 될 수 있단 말인가. 

  피어난 지 몇 날이나 되었다고! 필 때도 화들짝 놀라게 하더니, 질 때도 이리 와르르 무너지듯 하는가. 한 열흘도 옳게 머물러 주지 않고 이토록 무정하고 허무하게 져버리다니! 이럴 때 그 시인의 심정이 그래었겠구나. 그래서 이리 읊었겠구나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랬다. 내 한 해가 다 가버린 듯했다. 그리 고대해 온 한 해가 일시에 싹 가버린 듯했다. 이제 무엇에 기대어 이 한 해를 또 기다리며 살아야 할까. 무엇을 의지 삼아 또 한 해를 손꼽아 본단 말인가.

  가슴을 쓸며 회반죽 길 위에 패잔군처럼 널브러져 있는 꽃잎들을 다시 본다. 이리 잠시 머물다 가려고 그리 용쓰고 피어난 건가.  그래도 저대로는 한껏 피운 생애를 살았던가. 그래서 미련 두지 않고 가버린 건가.

  그래, 무엇인들 영원히 사는 게 있을까. 길고 짧은 것을 누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살 때만이라도 저들처럼 활짝 살 일이다. 질 때도 저들처럼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게 차라리 아름다울 수도 있으리라. 생애의 길고 짧음이 다 무엇인가. 활짝 살았음에야.

  다시 올 것이다. 온 것은 가야 하지만, 간 것은 또 돌아오지 않는가. 다시 올 그날을 그리며, 가는 그들에게 내 미련도 함께 싸서 보내자. 기다리자, 그 꽃 다시 활짝 필 때까지.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202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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