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십칠 년밖에

이청산 2022. 2. 8. 14:13

십칠 년밖에

 

이  일  배

 

  해가 바뀌었다.

  권 선배가 말했다.

  “이제 나는 십칠 년밖에 못 산다네요!”

  권 선배는 나보다 여덟 살이나 위이시지만, 막역한 술벗이다.

  “누가 그럽디까?!”

  “요새 백세 시대라잖아요! 하하”

  그러고 보니 권 선배께서는 올해 여든셋이 되셨다.

  “그러면 저는 십칠 년 후에는 누구와 술벗을 하란 말입니까? 하하”

  “그걸 난들 어찌 알겠소! 하하”

  하기야 누가 감히 앞일을 알 수 있을까. 어쩌면 권 선배는 이승에서는 나의 선배시지만, 세상을 바꿀 때는 누가 선배가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선배의 여명 십칠 년! 내가 이 한촌을 찾아와 산 걸 돌이켜보면 십칠 년도 잠깐이다. 바로 십칠 년 전 이 땅을 처음 디뎠다. 공직 발령을 따라 그해 초봄 이 궁벽한 산촌을 찾아왔었다. 둘러봐도 사방 보이는 건 산뿐, 그 안 좁다란 평지 몇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들, 그 넓은 교실에 몇 보이지 않는 아이들-. 이 적막한 골짝에 어찌 사나 싶던 것이 이태를 살고 나니 그 적막이 정으로 변했다. 다시 영을 따라 두 곳을 더 전전하다가 생애의 한 막을 거두고, 조용히 살 수 있는 곳이라 여겨 이 적막을 다시 찾아와 살고 있다.

  그 세월 그렇게 십칠 년을 보내는 사이에 선배같이 풍미 있는 분을 만나 적막을 또 다른 정으로 새기며 오늘도 이렇게 회포 어린 술잔을 마주하고 있다. 드는 잔마다 정이 담겨 있다면 선배와 내 몸의 세포들은 온통 정으로 흠씬 젖어 있을 것이다. 그 세월이 언제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당장에라도 손에 잡힐 듯한 순간들이 언제 그렇게 가버렸는지!

  이제 남은 세월이 또한 십칠 년이라니! 마치 불치의 고질을 안고. 시한부를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얼핏 스쳐 간다. 세월이란 그토록 재바르게 흘러 가버리는 것이라면, 선배와 함께하는 그윽한 술잔도 얼마나 더 들 수 있을는지, 생각할수록 아쉽고도 아릿하다. 그 십칠 년이란 것도 선배의 익살로 하는 말씀이라, 언제 어느 순간에 누가 먼저 세상을 달리하게 될지 모를 일 아닌가. 누가 이승을 두고 먼저 가든, 남은 이는 또 얼마나 아득할까.

  어찌 아득해만 할 일일까. 마음을 고요히 가눌 일이다. 오고 가는 것이야 누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문득 이 세상에 왔듯 홀연 갈 수도 있는 일이다. 오기로 되어 있어 오는 것이고 가기로 되어 있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고 가는 때도, 가고 남는 일도 고요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안타까움도 아득함도 다 싸안을 수 있는 일이다.

  장자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 혜자가 문상을 하러 가니, 장자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고락을 같이한 부인이 죽었는데 곡은 하지 않고 웬 노래냐 하니, ‘살고 죽는 거란 사계절이 돌고 도는 것과 같아 저 사람이 모처럼 천지 큰방에서 편히 자려 하는데, 내가 큰 소리로 운다면 천명을 깨닫지 못하는 짓’이라며 그래서 울지 않는다고 했다 한다. 그런 지경에는 못 미칠지라도 삶은 삶대로, 죽음은 죽음대로 천연히 받아들일 일이다.

  무명 생활 24년 만에 어느 오디션에서 우수한 성적에 올라 찬연한 빛을 보게 된 어떤 가수가 한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무명 생활이 힘든 게 아니라 언제 무명 생활을 끝낼 수 있을지 모르는 게 아주 힘들었습니다.”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앞날을 알 수 있었다면 오히려 그 생활을 못 이겨냈을지도 모른다. 선배께서 ‘난들 어찌 알 수 있겠소!’ 하며 짓던 호탕한 웃음이 오늘 우리의 술잔을 더욱 풍미롭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동인 활동을 함께하는 한 회원의 부군이 그리 많지 않은 향년으로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했다 한다. 환우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자리보전은 별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별안간 당한 상부의 처지가 얼마나 참담했을까. 남편이 죽은 슬픔을 두고 예로부터 ‘붕성지통(崩城之痛)’이라 하여 성이 무너지는 참사에 비유할 만큼 무엇보다 큰 슬픔으로 여겼다.

  감염병의 유행으로 문상이 자유롭지 못해 다른 이에게 조문의 뜻을 전했더니, 다녀온 문상객이 그 회원은 슬퍼하면서도 장례 일이며 문상객을 담담하게 잘 맞고 있더라고 전해주었다. 평소 사회 봉사활동도 열심히 해오던 그는 많은 사람을 겪어오는 사이에 오고 가는 것을 자연의 이치로 여기는 달관한 심덕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물며 이렇게 즐거이 살아있으면서 그윽한 술잔을 마주하고 있음에야 십칠 년이면 어떻고 홑 칠 년이면 어떤가. 그저 허물없이 살다가 빚이나 남겨 놓지 않고 갈 수 있다면, 그 죽음이야 삶과 무엇이 그리 다를까. 모두가 자연의 일이 아닌가.

  “언제 누가 오고 간들 무슨 상관이오? 자, 한잔 듭시다! 하하…”♣(20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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