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미술관으로 탈출하다

이청산 2021. 9. 8. 11:18

미술관으로 탈출하다

이   일  배

 

  “우리 일 한번 저질러 봅시다.”

  같이 막걸릿잔을 들던 권 회장께서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도 답답해서 사지가 비틀릴 것 같다고 했다. 무슨 일을 저지를까 하니 이건희 컬렉션을 보러 가자 했다. 뜻밖이다. 권 회장께서 미술에 소질이나 조예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나도 마찬가지여서 미술로 주담을 삼아 본 적조차도 없다. 

그냥 탈출해보는 거지요! 하하함께 웃었다.

  「코로나19는 많은 것을 묶어놓았다.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날 수도 없고, 만나서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석 달마다 한 번씩 가던 문화유적 답사도 못 한 지가 이태가 다 되어 간다. 견문이라도 좀 넓히고 살자면서 지역 사람들로 모임을 지어 명승 고적을 찾아다닌 지 십 년이 넘었다. 서로 어울려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적적한 한촌 살이 중에 누릴 수 있는 크고도 뜻있는 즐거움이었다.

  “그냥 휙 갔다 오지 말고 이것저것 다 타고 보면서 갔다 옵시다.” 견문도 챙기며 탈주해보자는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대구미술관에 전화해보니, 방역 관계로 관람 6일 전에 신청해야 하는데, 단체로는 4명까지만 관람할 수 있고, 시간대를 잘 지켜야 한단다. 코로나는 미술관이라고 예외를 두지는 않는 것 같다. 

청년 시절을 객지에서 보내다가 돌아와 반세기 넘게 고향을 지키고 있는 권 회장과 한촌 살이 10년을 넘긴 나, 이 한촌에서 나고 살면서 대처 나들이가 별로 없었던 김 씨 어른과 몇 해 전 대학을 정년퇴직하고 낙향한 김 교수, 이렇게 넷이서 뜻을 맞추었다.

  관람이 예약된 날, 새벽밥을 먹고 집을 나서 점촌역에서 6:59 무궁화호를 탔다. 기차를 타보기도 참 오랜만이라며 모두 감회에 젖었다. 코로나가 텅텅 비게 한 열차의 창밖으로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지나가는 푸른 산야며 마을 풍경이 오붓한 정감을 일으킨다.

  차는 김천역에서 멈추더니 갈아타라고 한다. ‘이것도 재미네~!’ 김 교수가 싱긋 미소를 짓는다. 구미의 빌딩 풍경을 지나 칠곡의 벙커 모습을 스치며 번화한 대구로 들어 9:12 동대구역에 닿았다. 대구 출입을 자주 하는 나더러 안내를 맡으라 한다.

  택시를 타고 대공원역으로 가자 했는데, 기사는 높다란 철길 위로 다니는 전동차를 보며 어린이대공원 쪽으로 갔다. ‘우리 저런 것도 한번 타봅시다!’ 권 회장이 외쳤다. 기사는 길을 잘못 들었다며 전철 타지 말고 미술관으로 바로 가자 했다. 오늘은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도심 우회로를 달려 미술관에 닿은 것은 10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숲에 둘러싸인 우람한 미술관은 옆문 하나만 겨우 열어놓았다. 방역을 위해 3단계의 점검 절차를 거쳐 들어와 앉아 대기하라 했다. 이 또한 탈출 체험 아니랴! 드디어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시를 위한 놀이터? 시가 놀이를 한다는 건가! 영상으로 보여주는 캄보디아 작가 크베이 삼낭의 영혼의 길, 원시림 속에서 건장한 사내가 벗은 채로 몸부림치고 있다. 무슨 몸부림일까.

쿠보 에이지의 그림자놀이, 그림자만 그려놓았네. 자신의 그림잔가? 그렇지, 누구든 그림자를 안 지우고는 살 수 없잖아. 박현기의 비디오 아트, 물이 넘치고 있네. 미술관이 다 젖겠다.

저건 뭔가? 흙으로 곱창 같은 것도, 떡가래 같은 것도 빚어 놓았네. 이강소 작가의 세라믹 조각이라네. 이정 작가의 저 사진, 풍경 속에 네온 글자를 새겨놓았군. ‘소리 없는 아우성같은 역설을 표현해놓은 거라나.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 이 사람이 왜 여기서 나와!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라며 달 앞에 토끼 한 마리 앉혀 놓았네. 저 그림, 어린아이 낙서 같은데? 내가 저렇게 해놓아도 작품이라 할까? 같이 웃었다. 이건희는 어디에 있는 거야? 무슨 무슨 누구누구 그림이며 조각들을 거쳐 2층에 올랐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다.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웰컴 홈 향연’, 전시장 입구에는 삼성과 대구의 관계, 이건희 회장에 관한 소개를 전광 슬라이드로 비추었다. 이 회장의 문화 보국 정신을 일러준다.

  전시장에는 이 회장이 기증한 서동진. 서진달, 이인성, 이쾌대 등 주로 대구 경북 출신 화가 8명이 그린 21작품을 전시해 놓았다. 추상화와 조각 작품도 있었지만, 인물화거나 풍경화가 많아 보기에 편했다. 서동진의 자화상에 이어 박명조 초상앞에서 내 눈길이 얼어붙었다. , 1 때 담임선생님! 반세기도 훨씬 전, 엄하면서도 자상하셨던 선생님의 모습이 선연히 떠오른다.

20대쯤의 모습인 것 같았지만 윤곽은 생전 모습 그대로다. 그때 선생님은 고명한 화가로 호가 우현(又玄)’이셨다. 얼굴이 검다고 호를 그렇게 쓰신다고들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도덕경의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玄之又玄(현지우현)’이란 구절을 빌리신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일행에게 선생님 이야기를 하며 잠시 지난 시절로 돌아갔다. 이 그림 하나 본 것으로도 나의 탈출은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혼자 뿌듯했다. 

서진달의 나부상, 이인성의 여인상, 이쾌대의 항구 풍경 등 여러 작품의 모양과 빛깔들을 눈에 담고 전시장을 나오니 어마어마한 크기의 차계남 다티스트(DArtist) 작품 30여 점이 눈길을 끈다. 폭이 거의 2~5m나 되는 널따란 화판에 검은색 노끈 같은 걸 죽죽 늘어뜨려 놓았는데 무슨 뜻인지 몰라도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 교수는 하나하나 죽을 작정하고 만든 것 같다고 했다. 그래, 코로나도 죽을 각오로 삐치면 제 놈이 어쩔 거야, 하고 한바탕 웃었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훨씬 지났다. 새벽을 가르고 나온 터라 모두 배가 몹시 고팠다. 저 화가들 예술 하느라 곯던 배를 우리도 체험하는 거라 웃으며, 정수기를 찾아 물을 몇 컵씩 들이켰다. 빨리 점심을 먹으러 가자며 1시에 운행한다는 셔틀버스도 기다릴 겨를 없이 마침 미술관으로 들어오는 택시를 타고 대공원역으로 내달았다. 

모두 지하철 우대권 발행기 앞에서 어리둥절했다. 회장님이나 김 씨 어른은 지하철도 처음인 데다 서울살이를 한 김 교수도 우대권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라 했다. 오늘 새로운 거 많이 본다며 신분증을 넣어 우대권을 받아 땅속을 달리는 차 탔다. 요동도, 소리도 없이 가는 차가 신기했다. 시장기 해결을 위해 반월당에 내려 땅 위 식당을 찾았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음식이 다 맛있다 했다. 막걸리 몇 잔과 더불어 요기를 하고, 가까이에 있는, 일제강점기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 시인 이상화 생가, ‘금연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민족 운동가 서상돈 생가까지 둘러보고 다시 도시철도를 탔다. 이런 강행군이 없다 하면서도 피곤한 얼굴에 미소를 그려냈다.

청라언덕역에서 지상철 3호선으로 갈아탔다. 권 회장께서 타보고 싶다는 열차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수십 미터 에스컬레이터에 모두 놀란다. 언제 이런 걸 다시 타볼꼬. 열차는 은하철도처럼 공중을 달리고 있다. 세상이 모두 눈 아래로 보인다. 만평역에서 내려 북부정류장까지 가는 한 정류소 남짓한 길이 지친 걸음으로 걷기에는 너무 멀다.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탔다. 오늘 어땠소? 힘은 들었지만 돌아가면 사지가 좀 덜 틀어질 것 같네. 오늘 힘든 걸 생각하면 그깟 놈의 코로나 못 이겨?! 탈출 잘해봤네. 그림은 울긋불긋한 빛깔 눈요기한 것만 해도 좋지 않았나. 게다가 지하철 지상철 다 타봤지, 민족 시인도 애국지사도 만나봤지, 오늘 탈출, 대성공 아니오? , 앞으로 이런 일 좀 종종 저지릅시다. 하하

  차는 계속 달려나갔다. 스르르 내려오는 눈꺼풀 위로 미술관에서 본 이인성의 꽃 그림이 소곳이 피어났다.(202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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