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산의 얼굴

이청산 2021. 10. 13. 14:05

산의 얼굴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늠름하고, 산자락에 안긴 나무들은 언제 보아도 생기롭다.

  나무는 늘 몸을 바꾸어 가면서 생기를 돋우어 간다. 지금은 한껏 푸르던 시절을 조금씩 넘어서고 있지만, 그렇다고 생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생기’란 무엇인가. 싱싱하고 힘찬 기운이기도 하지만, 바로 ‘생명 활동’이 아니던가.

더없이 무성했던 저 나무의 잎새들은 노랗고 빨간 물로 치장하다가 된바람 불어오면 또 하나의 제자리인 땅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나무는 맨 가지만 남아 설한풍을 이겨 내야 하지만, 그때야말로 나무에게는 새로운 삶을 위한 부푼 꿈의 시간이다.

  잎새가 내려앉은 땅이란 무엇이고 어디인가. 산이고 그 살갗이다. 나뭇잎은 산의 살갗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하늘 맑고 물길 좋은 때가 되면, 다시 나무의 줄기를 타고 세상으로 오른다. 잎도 되고 꽃도 되고 열매도 된다.

  다시 태어난 잎이며 꽃을 단 나무는 그 모습이 한층 새로워진다. 몸피도 조금은 불어난 것 같고, 새로운 꽃과 잎이 제 몸을 한결 단아하게 해주는 것 같다. 나무의 생기는 더욱 삽상해진다.

  나무는 이제 잎을 점점 크게 피워가다가 무성한 녹음을 이루고, 꽃을 피웠던 자리에는 탄실한 열매를 달 것이다. 새들이 오면 그들의 놀음 자리가 되고, 뭇 짐승이 깃들면 포근히 안아 주고, 지친 인간들이 오면 푸근한 그늘을 드리워 줄 것이다. 

나무에 잎이 돋고 꽃이 피고 돋은 잎이 무성해지고, 색색 빛깔을 물들이다가 다음 시절을 기약하며 땅으로 내려앉고, 그사이에 가지는 더욱 튼실해지는 새로운 날을 꿈꾸고……. 이런 활발한 생명 활동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산이다. 산이 그 생기를 돋우어주고, 그 꿈을 꾸게 해준다. 산이 그들에게 자양을 주어 살 수 있게 해주고, 품어 안아 주어 꿈을 꿀 수 있게 해준다. 그들에게 새도 날아오게 해주고 바람도 쉬어가게 해준다. 산이 아니면 무엇이 그렇게 하겠는가.

  그렇지만 산은 아무 말이 없다. 산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눈이 내리면 눈을 맞고 비가 오면 비에 젖고, 바람이 불면 품어 줄 뿐,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다. 산의 얼굴은 언제나 그 모습 그 모양 그대로다.

  나무를 향하여 ‘내가 너를 낳았노라.’고 하지도 않고, 그리하여 ‘너는 나의 것이다.’라고는 더욱 말하지 않는다. 그냥 바라볼 뿐이다. 아니, 비라 본다는 생각조차 없다. 노자가 이런 산의 모습을 본 것 같다. 말씀이 그렇다.

  “성인은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을 만들어 내지만,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생기게 하고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道德經』 第2章)”

꼭 산을 두고 한 말씀 같다. 성인이 하는 일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 굳이 내색이나 생색을 내려 하지도 않는다. 무엇을 이루었다 해도 자기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여기서 ‘성인’은 자연이라 해도 좋고, 산이라 해도 무방하다.

  세상이 한창 시끄럽다. 조그만 일을 해놓고도 아주 큰 일을 한 것처럼 떠벌린다. 아무 일을 하지 않고서도 많은 일을 한 것처럼 내세우기도 한다. 좋은 일이면 어떤 일이든 자기를 주장하기 바쁘고, 좋지 않은 일이면 자기가 하고서도 발뺌하기 급하다.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잘났다. 남의 잘난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어떻게든 깎아내려야 한다. 자기의 모습은 별 게 아닐지라도 어떻게든 훌륭하게 보이도록 잘 꾸며야 한다. 친한 이도 득이 되지 않으면 과감히 내쳐버린다.

  그 세상의 표정은 시시로 바뀐다. 웃었다가 울기도 하고, 화평한 체하다가 불같이 화를 돋운다. 성자인 척하다가 순식간에 악마가 되기도 한다. 이름에 빛이 좀 들게 했다가도, 그 이름을 순식간 시궁창에 쑤셔 박기도 한다. 

우리의 산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해도 욕심 없이 하는 산, 무엇을 이루고도 제 공이라 하지 않는 산, 제가 이루고도 제 것이라 하지 않는 산. 아니 그렇게 하고서도 그 얼굴에 표정을 바꾸지 않는 산, 표정을 바꿀 줄 모르는 산.

 누굴 향해 무얼 바라랴. 시시로 웃다간 울고, 시시로 폈다간 일그러지고, 시시로 난 척하다가 찌그러지는 내 얼굴이 아니던가. 그러고서 그 산 어찌 바라고 싶다 하랴.

  그래서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의 고요에 다시 안긴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산경(山景)」 도종환)

  이런 산을 위하여, 오늘도 산의 고요 속으로 걸음을 옮긴다.♣(20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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