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평안한 사람

이청산 2020. 6. 24. 19:16

평안한 사람

 

망팔쇠년도 성큼 넘어서고 보니 참 많이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은 아무리 백세 시대라지만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엄청 더 많은 걸 보면서 오래 살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갈 날에 대한 상상의 양보다 살아온 날에 대한 기억의 양이 더욱 많게 느껴지는 것도 많이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도 다 그럴까. 살아온 지난날 속에는 희로애락의 온갖 기억들이 점철되어 있을 것이지만, 돌리고 돌려 떠올려봐도 나에게는 기쁘고 즐겁고 떳떳했던 일보다는 힘들고 괴롭고 부끄러운 일들에 대한 기억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지난 일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몸도 마음도 내려앉는 것 같아 무거워지기만 한다.

그때 그 일을 왜 그렇게 했을까, 그 사람을 왜 그렇게 대했을까, 그 순간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왜 좀 더 따뜻하고 자상하지 못했을까……. 돌아볼수록 아리고 후회스러운 기억들이 온통 가슴을 아릿하게 저민다. 모른 체해지지도 않고, 지울 수도 없는 과거 속의 일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 먹먹하다.

누구 그랬다던가. “노인이 되어 참을 수 없는 것은 육체나 정신의 쇠약함이 아니라 기억의 무게를 견뎌내는 일이다.(W.S.Mougham)”라고. 미소로 떠올릴 수 있는 기억들이 많이 있다면 그래도 그 무게를 감내도 해볼 만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기억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하면 견뎌내기 힘든 무게가 온몸을 죄는 것 같다.

무엇을 탓하랴. 내가 잘못 판단하고 잘못 행동하면서 잘못 살아온 탓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살아온 날들이지만 이제 와서 어쩌랴. 쟁여져 있는 기억들을 다 어찌해야 하는가. 이 기억들을 안고 살다 보면 살아갈 날인들 온전할 수가 있을까. 후회는 후회일 뿐, 그것이 어찌 앞날의 일을 밝게 닦아줄 수 있을까.

어느 정신과 의사는 한 방송 프로에서 좋지 않은 기억들을 종이에 적어 쓰레기통에 던져넣어 보면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다고도 했다. 그 쓰레기통을 몇 번이나 비워야 어지러운 생각을 다 떨칠 수 있을까. 어찌하면 얽히고설킨 생각들을 떠나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을까.

부처님의 한 제자가 무엇을 보고 어떤 계율을 지키는 사람을 평안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며 부처님께 물었다. 부처님이 대답하시기를 죽기 전에 집착을 떠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미래에 대해서도 별로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했다.

불교 최초의 경전인 숫타니파타(Suttanipata)에 나오는 말씀이다. 경전의 어느 말씀인들 새기고 싶지 않은 것이 있으랴만, 이 구절에 문득 눈길이 박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살아온 날이 많다 보니 쌓인 기억도 많아 그 무게를 견디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살아온 날이 많다는 것은 집착해야 할 일이 그만큼 적을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닐까.

이제 나에게 무엇이 더 필요한가. 재물이 탐나는가, 명예가 부러운가, 의식주가 편해야 하는가, 지위가 그럴싸해야 하는가. 집착을 떨쳐야 할 것은 그것들만이 아니다. 과거는 나에게 무엇이며, 미래는 또 나에게 무엇인가.

부처님은 또 평안한 사람이라 할 만한 사람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미래를 원하지도 않고, 과거를 추억하며 우울해하지도 않는다. 감각에 닿는 모든 대상에서 멀리 떨어질 것을 생각하며, 어떤 견해에도 이끌리는 일이 없다.”

살아갈 날이 아무리 길다 해도 살아온 날보다는 훨씬 짧을 터, 미래에 무슨 큰 원을 걸 수 있으며 무엇을 욕심내어 원으로 걸 것인가. 지난 과거란 내가 부리고 저질러놓은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 마음대로 고치고 다듬을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돌이키는 추억으로 마음을 우울해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과거에 대한 우울도 미래에 대한 욕심도 모두가 집착이 아니던가.

현재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재란 무엇인가. 어느 순간이 현재인가. 이 순간이 바로 과거의 맨 뒷장이고 미래의 맨 첫 장이 아닌가.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가 다시 우울한 과거가 될 수도 있고, 욕망에 잡힌 미래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 우울도, 욕망도 짓지 않으려면, 모든 대상이 와 닿는 눈이며 귀, , , , 뜻 들이 움직이는 바를 마음 여겨볼 일이다. 내가 무엇에 또 끌리고 있지 않은가. 이 또한 집착에 매이는 일일까.

내가 저지른 과거 때문에 아픔을 겪은 이들에게는 참으로 면구한 일이지만, 이제 모든 과거로부터도 놓여나고 싶다.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은 만큼, 나에게 올 미래도 무엇으로라도 얽어매고 싶지 않다.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현재의 감각에서도 떨어질 것을 기리며 살다 보면, 미래도 자유로운 것이 되지 않으랴. 살아온 날에서 자유롭다가 보면 살아갈 날도 자유롭지 않으랴. 그 자유가 그립다. 평안하게 살고 싶다.

그러나, 사람아! 보고 싶은 이들은 어찌하랴. 그리운 이들이 그리워지는 마음은 어이해야 하는 건가. 홀로 아득할 수는 없지 않은가.(20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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