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무의 염치

이청산 2020. 5. 24. 12:28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날마다 오르는 산이지만 오를 때마다 설렌다. 나는 왜 산을 오르는가. 산이 있고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산의 품은 넉넉하고, 그 품속의 나무는 푼푼하다. 그 넉넉하고 푼푼한 품으로 드는 걸음이 어찌 설레지 않을까.

산은 품지 않는 것들이 없다. 어떤 것이 찾아와도 늘 품을 벌려준다. 내치는 법이 없다. 세상에 이보다 넓은 품이 있을까. 그 품을 사는 나문들 어찌 산과 마음을 따로 할 수 있을까. 산의 너그러운 기운을 받아 죽죽 뻗어나면서 어떤 것에게도 기다렸다는 듯 가슴을 내어준다. 산과 나무는 한 몸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런 산과 나무가 사는 산을 어찌 오르고 싶지 않으랴. 생기 차게 뻗쳐오르는 나무의 몸통이며, 푸른 잎 싱그러운 가지들을 보노라면, 몸속의 모든 혈관에 더욱 세찬 기운이 돌이 치는 것 같다. 세상을 횡행하는 어떤 거친 말과 일도 이 나무 앞에서는 다들 숨을 죽일 것 같다.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르고들 있는 나무를 본다. 땅에서부터 하늘 향해 솟아오른 몸통을 따라 눈길을 같이 올려본다. 산의 넉넉한 품속을 사는 저들일지라도 조금의 다툼은 없지 않은 것 같다. 옆의 것이 오르면 저도 왜 오르고 싶지 않을까. 햇빛을 어찌 함께 누리고 싶지 않을까. 당연한 다툼일지도 모르겠다.

큰 줄기를 따라 눈길을 우듬지로 올리는데, 갑자기 눈이 확 부신다. 조그만 틈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동자를 쏜 것이다. 눈을 쏜 햇살은 나무 사이를 비집고 땅에까지 내려앉는다. 이 무성히 우거진 우듬지에 웬 틈새인가.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본다. 나무와 나무의 가지 사이에 틈이 져 있다. 내쳐 뻗어나려다 이웃 나무의 가지를 보고 멈칫 서버린 것 같다. 이들도 무슨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를 하는 건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걸 두고 ‘수관 기피(樹冠忌避)’라 한다고 했다. 이 현상은 키가 큰 나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데, 나무가 자라다가 가장 높은 곳에 이르러 가지가 서로 닿으려 할 때 가지를 움츠리거나 성장을 멈추기 때문이라 한다. 이 희한한 일이 왜 일어나는 걸까?

학자들은 해충이나 전염병이 퍼지지 않게 하는 전략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가장 유력한 학설은 ‘햇빛을 골고루 이용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빛을 충분히 받기 어려운 숲 환경에서,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며 살아가기 위한 나무의 생존 전략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나무의 생태를 따라 이런 학설을 세웠을지언정, 이야말로 ‘나무의 염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염치(廉恥)’란 무엇인가.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아니던가. 햇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이웃과 다투어 하늘 향해 솟아올랐을지라도, 결코 이웃에 폐를 끼칠 수는 없어 체면을 차린 것이다. 다투어 오른 것에 부끄러움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리 보면 ‘수관 기피’라는 말보다 ‘수관의 수줍음(crown shyness)’이라 한 영어 표현이 더 마땅할지도 모르겠다. 수줍어하며 조용히 나래를 펴가는, 이런 일이야말로 착한 다툼이요, 아름다운 염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무의 이런 모습과는 달리 인간 세상에는 몰염치, 파렴치가 판을 치고 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되레 큰소리치는 정치꾼들, 정의와 인권을 내세우면서 딴 속만 차리는 무슨 단체 책임자, 달콤한 말로 애먼 투자자를 속여 거액을 빼돌린 사기한, 무지막지한 갑질로 경비원을 극단으로 내몬 어느 아파트 입주자…….

생각 속에 들여놓기조차도 역한 이런 염치 없는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어쩌면 지금은 염치가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더 끓고 있는 세태인지도 모르겠다. ‘염치 불고(不顧)’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염치 불구(不拘)’하는 사람들이 들끓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염치를 차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염치 같은 건 아예 팽개치고 사는 일들이 만연하다는 말이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이 세상에 염치없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며, 그들도 꼭 있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들에게 보다 관대해질 수 있다고 했다. 그 ’염치없는 사람‘들이란, 물론 ‘염치 불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염치 불고’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세상에는 염치를 돌아볼 수 없을 만큼 절박한 상황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 안는 것도 염치가 있는, 염치를 아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산이며 나무를 본다. 세상 모든 것을 너그러이 다 안고 있는 산이거늘, 안겨 있는 나문들 어찌 이웃을 돌아보지 않고 염치를 차릴 줄 모르랴. 다시 나무를 본다. 서로 앉아줄 듯 안길 듯 서 있다. 어쩌면 이들에게는 숫제 염치라는 게 없는지도 모르겠다. 저 마음이 바로 염치인 걸, 굳이 염치를 낼 일 있을까. 이웃과 이리 더불어 사는 게 바로 염치 아니랴. 수관 그 수줍음에 눈길 다시 새긴다.

산이 되고 싶다. 나무가 되고 싶다. 자연의 염치, 염치의 자연이 그립다.

그리움으로 산을 내린다.♣(2020.5.17.)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안한 사람  (0) 2020.06.24
산은 영원하다  (0) 2020.06.14
추억을 아름답게  (0) 2020.05.10
나무의 복명(復命)  (0) 2020.04.27
바이러스 속에 꽃은 지고 나룻은 성해지고  (0) 2020.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