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바람 따라 갈 뿐이다

이청산 2019. 11. 3. 11:51

바람 따라 갈 뿐이다

 


오늘도 일상의 산을 오른다. 산의 기운이 많이 달라졌다. 푸르던 잎새들이 하나둘 노란색이며 연붉은색으로 물들어간다. 그중에 어느 것은 땅으로 살포시 내려앉기도 한다. 작년 이맘때쯤도 그랬었다. 어디에 그 기억들을 갈무리해 두었던지 저들이 오고 가야 할 때를 잊지도 않고, 놓치지도 않는다.

나무 하나가 또 넘어져 몸통을 땅 위에 눕히고 있다. 선 채로 오랜 세월을 말라가던 나무다. 나무는 늘 그랬다. 뭇 나무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싱그럽게 치솟아 올라가다가 어떤 연유로든 그 기력이 다했다 싶으면 선 자리에서 숨을 죽이고 말라간다. 강대나무가 되는 것이다. 산의 나무가 세상을 떠나는 방식이다.

아니다. 나무는 결코 세상을 떠나지 않는다. 몸 바꿈을 할 뿐이다. 강대나무가 되어 한동안 다시 하늘 바라기를 하며 뭇 생명체들을 안아주다가 서서 버틸 힘이 떨어져 간다 싶으면 땅 으로 내려앉아 자기를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의 보금자리 노릇을 이어간다.

그렇게 또 오랜 세월 동안 제 노릇을 해가는 사이에 부는 바람이며 내리는 비와 더불어 제가 깔고 있는 흙에 동화되어 가다가 마침내 저도 흙이 된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다. 흙 속으로 든 나무는 어느 봄철 따스한 볕이 흙 속으로 스밀 때, 그 기운을 받아 새로운 생명이 되어 다시 솟아나는 것이다.

나무는 이 세상의 하늘을 오래도록 보고 싶어 욕심내지도 않고, 그 욕심을 위해 몸부림을 치지는 더욱 않는다. 눈을 감고 말라갈 때가 되면 말라가고, 내려앉을 때가 되면 내려앉고, 흙 속으로 들 때가 되면 들 뿐이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흘러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가 되면 순리를 따라 다시 돌아온다.

저 나무를 보며 내 선 자리를 가늠해 본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서 어디에 서 있는가. 아직은 가지를 펴들고 풋풋한 잎을 달고 있는 나무 같고 싶기도 하지만, 푸르던 빛이 노랗고 붉은색으로 빛깔을 바꾸어가고 있는 저 나무에 내 얼굴이 비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강대나무 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물학자들은 생명현상을 주로 세 가지 조건을 들어 규정 짓는다고 한다. 첫째는 외부의 물질을 받아들여 다른 물질로 바꿀 수 있는 물질의 대사이고, 둘째는 외부 환경이 바뀌었을 때 그 변화에 반응하는 환경의 대처이고, 셋째는 자신과 유사한 형태의 자손을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재생산할 수 있는 자체의 증식을 들고 있다.

이 조건에 비추어 볼 때 나의 생명현상이란 그 기능이 막바지를 향하여 시나브로 다가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 몸속에 들어온 물질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기능이며, 쉼 없이 변하고 있는 여러 가지 환경에 대처하는 능력이 옛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생산 기능도 영육 간을 불문하고 아득해져 가고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쇠잔해져 가다가 마침내는 저 강대나무처럼 되어 땅속 자리를 잡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오늘이 나의 날인 것처럼, 그날도 물론 나의 날이다. 오늘을 내가 잡고 있는 것처럼, 그날도 잡아야 할 나의 날이다. 저 나무가 말없이 말라가다가 조용히 흙이 되어 가는 것처럼, 그렇게 몸 바꿈을 해가야 할 일이다.

나는 가족들에게, 내가 만약 난치병이나 불치병을 얻어 기동을 못 하게 된다면, 진통제 처방이나 잘 받아달라고 했다. 연명 치료 같은 것은 일순간이라도 하지 말라고 말해둔 지는 오래다. 난치병을 굳이 다스려 목숨을 조금이라도 늘이려 애쓰지 않아도 될 만큼은 살았다고 싶기 때문이다. 불치병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고통에는 용감할 자신이 없다. 끔찍한 병이 주는 통증을 생각하면 병을 앓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무슨 죄인으로 몰려 극악한 고문이라도 받게 된다면 쉽사리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상상까지도 해본 적이 있다. 나는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 못 되는 것 같다. 거저 고요히 살다가 고즈넉하게 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 바람만으로 살아가기에는 스스로 민망하여 부지런히 산책길을 걷고, 산을 도두 오르며 근력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오늘 오르는 산도 그 걸음이다.

토굴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도에 정진하던 경허(鏡虛, 1849~1912) 스님이 예순세 살 되던 어느 봄날, 아이들에게 내일 가야겠다.”하고 작별을 고하니, 아이들이 어디로 가시는데요?”하고 묻자 바람 따라갈 뿐이다.”라고 했다 한다. 그리고는 붓을 들어 일원상(一圓相)을 그린 뒤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원적(圓寂)에 들었다고 한다.

그 깊은 경지에 이를 수는 없어도, 생명현상이 더할 수 없이 쇠진해졌을 때 늘 드는 잠자리에 들어 편안히 잠들듯 갈 수 있다면, 그야말로 바람 따라가는 일이 아닐까.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잠시 바람 속으로 드는 몸 바꿈이 아닐까.

그런 날을 그리며 나는 오늘도 산을 오른다. 무념무상으로 하늘 바라기를 하고 있는 나무를 눈에 새기며, 무장무애로 몸을 눕히고 있는 나무를 가슴에 담으며 산을 오른다. 마루를 물들이고 있는 노을빛은 어제처럼 곱다.(201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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