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하물며 사람의 일이야

이청산 2019. 12. 9. 14:50

하물며 사람의 일이야

 

산을 오른다. 푸근하게 쌓인 가랑잎 밟는다.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포근하고 유정하다. 이 소리를 품으려고 떨어져 쌓였는가. 누워있는 가랑잎들이 아늑하고도 평안해 보인다. 이 평안을 위하여 그토록 찬연하게 푸르렀던가.

엊그제 초록으로 무성했던 잎들이었다. 애채에 돋아난 애잎이 시나브로 크기며 빛깔을 더해 가면서 시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흘러갔다. 그 여름이 무릇 제철이기라도 한 양 한껏 푸름을 돋우었지만, 마냥 그렇게 머물지만은 않았다.

하늘이 높아지고 선들바람이 나뭇잎을 쓰다듬는 사이에 빛깔이 조금씩 변해갔다. 마치 저들 한 살이의 노을빛이라기도 하듯 고운 물이 들더니 깃털 같은 몸짓으로 지상에 가벼이 내려앉는다.

이제 제 자리를 잡은 듯 도란도란 누워있는 저것들은 오늘 이 순간을 위하여 철을 맞이하고 보내기를 거듭했던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들은 안다, 또 어디인가로 가야 하는 것을. 무엇인가로 몸 바꿈을 해야 하는 것을.

어디 저들만이랴. 세상에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일찍이 노자(老子)도 말했다. ‘돌개바람은 한나절을 불지 못하고, 소낙비는 하루 내내 쏟아지지 못한다.’(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道德經』 同道)고 했다.

세상을 세차게 바꾸어 놓을 것 같은 그 거센 것들도 한나절이며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당연한 말을 천연하게 한 것 같기도 하다.

돌개바람이며 소낙비가 오래가지 않게 하는 존재란 천지(天地), 즉 자연이라 했다. 말씀은 또 이어진다. ‘천지가 하는 일도 이리 오래가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람의 일이야.’(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라고 했다.

그랬다. 자연은 무엇이든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는 법이 없다. 천지의 흐름을 따라 날 것은 나고 죽을 것은 죽고, 찰 것은 차고 빌 것은 빈다. 흐를 것은 흐르고 그칠 것은 그친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나고 죽고, 비고 차고, 그치고 흐르는 것은 쉼 없이 이어진다.

자연이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의 일이야! 사람인들 어찌 늙기를 싫어하고 죽지 않기를 바랄 수 있으랴. 사람도 자연의 일각이 아니던가. 나는 것도 자라는 것도, 늙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자연의 일임에야 어찌 머물러 장구(長久)를 바랄 수 있을 것인가.

해봤자 객쩍은 말을 열없이 한다 하지 말라. 당신은 아리땁게 핀 꽃은 영원히 두고 보려 한 적은 없었는가. 한번 잡은 부와 권세는 영원히 붙잡고 있으려 하지 않는가. 차지한 자리는 영구히 누릴 수 있을 것 같은 미몽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산을 걷는다. 몇 남지 않은 잎새가 소리 없이 지고 있다. 지는 저 잎새는 달려있던 가지를 돌아보지도 않고 야멸차다 싶으리만치 홀홀히 떨어진다. 떨어지는 자리가 예전부터 익숙했던 제 자리인 양 사붓사붓 내려앉는다.

나뭇가지인들 떨어지는 잎새를 애석해할까. 정 머리 없이 저만 두고 간다고 애탄이라도 할까. 잎새를 보내는 가지도 야속하리만치 덤덤하다. 잎새 하나 떨어진다고 가지가 흔들릴 일도 없다. 잎이 달려있을 때나 떨어져 나갈 때 그 모습에는 변함이 없다.

당연한 몸짓들이다. 가지가 잎을 나게 하는 것도, 지게 하는 것도 거저 제 일로 할 뿐이다. 잎도 그렇다. 태어난 가지도 내려앉는 땅도 모두 제 자리일 뿐이다. 그러니 떠난 자리를 두고 어찌 미련을 가질 것이며, 보낸 자리를 두고 어찌 애탄(哀歎)에 잠길 것인가. 이를 두고 노자는 또 천도무친(天道無親)’이라 했다. 자연은 사사로움이 없다는 말이다.

사람인들 어찌 사는 일이며 죽는 일에 사사로움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살 때는 남은 마음 없이 한껏 살다가, 죽을 때는 남긴 마음 없이 순순히 눈 감을 일 아닌가. 저 나뭇잎이 가지를 떠나듯, 떠나 땅 위에 소곳이 내려앉듯.

산을 걷는 마음이 이리 편할 수가 없다. 산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삶도 있고 죽음도 있고,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다. 모든 것이 하나 되어 있는 산이다. 죽음이며 삶을, 기쁨이며 슬픔을 따로 가리지 않아도 좋을 이 산을 걷는 걸음이 이리 가벼운 걸 어찌 진작 알지 못했던가.

떠나는 것도 있고 돌아오는 것도 있는 산을 오른다. 오늘 저 잎새와 함께 떨어져도 좋고. 내일 저 푸른 잎을 향해 손을 마주 흔들어도 좋을 산이다. 이런 산이 어찌 편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 길의 걸음이 어찌 가볍지 않을 수가 있는가.

정밀(靜謐) 속을 뒹구는 가랑잎 소리가 그리운 이의 성음인 듯 정겹다.(2019.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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