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읽어버린 길섶

이청산 2019. 6. 4. 12:32

잃어버린 길섶

 

요즈음은 시골에도 마을을 나드는 길이며 조붓한 고샅까지 포장이 안 된 곳이 거의 없다삼십 여 가구가 사는 우리 마을에도 물론 모든 길이 다 포장되어 자동차며 농기계가 잘 지나다니고 있다사람들은 그냥 잘 지나다니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큰 차도 작은 차도 잘 다닐 수 있을 뿐만 아니라오가는 차가 서로 비켜가기 편하도록 마을로 드는 길을 넓혀야겠다고 했다마을 이장이 관청에 길을 넓혀 달라고 청을 넣었다관청에서 지정한 업자가 와서 공사를 시작했다.

길섶을 모두 파헤쳤다길섶에는 봄까치꽃이며 꽃다지달개비꽃이며 제비꽃이 피어 있었다둔중한 굴삭기 버킷이 긁고 가면서 풀꽃은 짓이겨지고 맨흙이 드러났다그 자리에 이내 회반죽이 길게 드러누웠다며칠 뒤에 아스팔트가 덧씌워지고 길은 넓어졌다.

이장은 의기가 양양해지고가는 차오는 차는 잘 비켜 다니게 되었다모두들 동네가 더 발전되었다고 여겼을 것이다소중한 무엇을 잃어버린 것처럼 아린 마음으로 그 길을 밟는 사람도 있으리라는 것을 아는 이는 없을 것 같다알면 비소를 자아내게 할그런 사람은 모르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한 생을 정리하고 남은 생을 산수 좋고 인심 맑은 곳에서 살아보겠다고 한촌을 찾아와 삶을 갈무리한 지도 강산이 변할 세월을 코앞에 두고 있다사람들은 한 번 강산이 변하는 세월을 십 년으로 잡고 있지만십 년도 채 되지 않아 강산도 인심도 크게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

모든 문명이 진화하면서 편리한 삶을 향하여 빠르게 변하고 있는 요즈음 세상의 흐름이 한촌이라고 비켜 갈 수는 없을 것이다문명에 대한 열패감 때문인지는 몰라도오랜 세월을 한촌에 터전을 잡고 살아온 사람들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변화를 끌어들이려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촌이라고 편리를 어찌 외면해야 할까만그 편리 속에 모든 것이 매몰되어 아늑한 풍광과 정서가 사라져 가고 있는 걸 보노라면 아쉽고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모든 곳이 도시화되어 버려 어느 곳을 가나 거기가 거기 같다면얼마나 삭막한 노릇일까굳이 한촌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어느 산 아래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났다산은 그리 크고 높지는 않지만 기암괴석이며 마애불상과 오래된 석탑 등 불교 유적이 적잖게 있고 경관도 수려하다고 한다그런 유적이며 경관이 오랜 세월 묻혀만 있었는데그 산에 있는 절에 주지가 새로 부임하면서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그 산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스님은 산의 가치를 알아보고 갖은 형상을 한 바위며 선인들의 숨결이 어린 유적들을 더 많이 발굴해 내어 경주 남산에 비견할 만하다며 관에도 호소하고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 공원 조성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일이 이쯤 진척되고 보니 우선해야 할 일이 진입로를 닦는 것이었다기왕 길을 내려면 널따랗게 닦아 차량 통행에 불편이 없도록 해야 한다며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주장하고 나섰다모두 노령기에 있는 그 마을 사람들은 집 앞까지 길을 훤히 닦아 객지의 아이들이 다니러 올 때 불편하지 않고택시며 버스가 잘 다녀서 나들이가 편리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공원 조성 추진에 앞장 선 스님이며 많은 사람들의 바람은 그게 아니었다제비둥지같이 조그만 마을에 소음과 매연이 들끓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수려한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함께 도모할 수 있는 길이며그런 경관 조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그러자면 인공적인 교통수단은 줄이고 편안하게 걸으면서 조용히 사색에도 잠길 수 있는 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주민들과 논의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라고도 했다.어떻게 의논이 모아져서 일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는 모르겠다주민의 의사를 전혀 모른 체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차 편리만을 위해 자연이 분별없이 훼손되어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싶다.

몇 년 전 내가 사는 강둑이 온통 회반죽으로 덮여버린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차가 다니지 않아도 좋을 그 강둑에는 사람들의 발자국 길만 나 있을 뿐온갖 풀들의 세상이었다.요즈음 세상에 이런 길을 두고 있는 곳이 어디 있느냐는 여론이 일자 관에서 풀꽃들을 갈아엎고 콘크리트로 덮어주었다.

차가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길만이아침 이슬에 바짓가랑이를 적시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길만이 좋은 길일까그 편리만이 행복으로 가는 길일까도시는 도시대로 번성하고향촌은 향촌대로 고즈넉한 풍광과 정경을 간직해서서로 바꾸어 누리기도 하면서 함께 아늑히 살아볼 수는 없는 일일까.

우린 지금 사람의 길을 잃어가고 있다그 길섶은 더 많이 잃어가고 있다잃어진 길이며 길섶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그것들이 다 사라졌을 때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어떤 길을 걸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마을을 드나들 때마다 사라진 길섶이 마음을 아리게 한다잃어버린 봄까치꽃이며 제비꽃은 어디에서 피고 있을까그것들은 어느 땅 어떤 곳이라야 제 모습을 지키며 살 수 있을까.(2019.5.28.)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산(群山)의 기억들  (0) 2019.06.30
소루쟁이를 본다  (0) 2019.06.24
나도 오월인가  (0) 2019.05.23
뜨거운 우리말 사랑을 위하여  (0) 2019.05.16
견일영 선생님의 빗돌  (0) 2019.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