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같이 만나세

이청산 2019. 1. 19. 20:20

같이 만나세

 

두 친구를 만났다두어 달 만이다언제 어느 때에 만나자는 기약은 두고 있지 않지만한촌을 사는 내가 친구들이 있는 곳을 가게 되면 연락해서 만나곤 한다두 시간여 차를 타야 하는 거리라 만만히 다닐 수가 없어 볼일을 보러 가게 될 때 연락하여 만나기도 하고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볼일을 만들어 나서기도 한다.

자연과 더불어 조용히 살겠다고 한촌에 삶의 터를 두어 살고 있지만바람소리 새소리와 더불어 살다보면 때로는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워지기도 한다정다운 친구들과 둘러앉아 함께 드는 술잔으로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는 일도 즐겁고 생기로운 일로 여겨질 때도 없지 않다그런 상념들이 마음 깊숙이 파고들면 전화기를 든다.

아침에 집을 나서 점심나절에 도착한 곳에서 같은 예술적인 관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만나 즐겁고도 진지한 모임을 가지고저녁때에 두 친구와 상봉을 했다. “여전하네그래!”가 첫인사다그 여전한 모습들이 그지없이 반갑다나이 탓일까화제는 항상 건강 이야기부터 시작된다.가벼운 유머를 주고받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화락과 영탄을 함께 나누는 사이에 밤도 정도 깊어간다.

나는 두 사람과 모두 친한 사이지만이태 전만 해도 두 친구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나들이 길마다 한 사람씩을 따로 만나 정회를 나누곤 했었지만길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을 따로 만나기가 시간도 녹록지 못했다함께 만나면 어떨까 하고 두 친구에게 제의를 했더니 뜻밖이라 여겨질 정도로 쉽게 응해 주었다.

걱정이 없지는 않았다두 친구가 살아온 세월의 모습이 전혀 다르고 우정을 맺게 된 계기도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한 친구는 중학교 일학년 때 학반을 같이 했던 인연으로 만나 평생지기가 된 친구고또 한 친구는 사십여 년 전 같은 일터에서 한 해 함께 근무한 연분으로 반평생 넘는 세월을 두고 서로 깊은 마음을 나누고 있다둘 다 한 해 인연뿐이지만그 한 해가 평생을 건 우정을 갖게 한 것이다.

어린 시절의 평생지기는 섬유공학을 전공하여 회사 경영자까지 오른 친구고한 친구는 사범대학을 나와 한생을 교직에 걸었다가 퇴직한 사람이고 보면삶의 방식이나 경험 세계가 아주 달라 어떤 대화로 마음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염려가 없지 않았다굳이 면식을 따지자면 십 수 년 전 내 큰아이 혼사를 서울서 치를 때 하객 차를 함께 탄 인연이 있긴 했지만그것도 까마득한 세월 앞의 일이다어쨌든 내가 교집합의 완충지대 노릇을 해보리라 하고어느 날 셋이서 함께 자리를 했다.

내 염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놀라울 정도로 그들은 친숙을 더해갔다나를 가운데 두고 풀어나가는 화제들이 만발한 꽃이 되어 서로의 가슴을 수놓는 듯했다달리 살아온 일들이야 지금은 강물처럼 다 흘러 가버린 것그런 것들은 회억 속에나 있을 뿐 지금 우리의 모습이며 마음이 중요하다는 데 대하여 누구도 다른 사념을 새기려 들지 않았다모두들 고적하게 늙어가는 처지에 함께 마음 맞추어 드는 이 술잔보다 더 값진 것이 무어란 말인가!

이런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는 데는 한 친구의 정겨운 유머가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세상의 어떤 험한 일도 그의 말을 거쳐 나오면 유쾌한 해학이 되어버리니 우리의 대화는 늘 오붓이 피어나는 웃음꽃과 더불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또 하나는 살 만큼 산 이력 때문일까무슨 이야기를 나누어도 도가니 속의 쇳물처럼 모두 하나로 용해되어 버리는 것이다날짜를 정하지도 않은 채 불원간 다시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헤어질 때두 친구는 먼 길 떠나는 내 모습이 차창에서 지워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어느 날또 다른 지음(知音한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화제로 즐거운 담소를 나누다가 내가 만나고 있는 친구들 이야기에 이르렀다서로 모르는 두 친구를 함께하게 해 셋이서 따뜻한 모임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했더니대뜸 자기도 좀 끼워’ 달란다그 친구도 세 사람이 나누고 있는그런 대화들을 함께하고 싶단다두 친구에게 그 친구 뜻을 전했더니 선뜻 응낙을 하며 다음에 함께 만나자 했다못 만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문득 김형석 교수의 어느 책에서 읽은 세 친구 이야기가 떠오른다김 교수는 같은 철학자인 안병욱 교수국사학자인 한우근 교수와 셋이서 아주 친하게 지내다가 한 교수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남은 두 사람이서 허전해 하다가 한 친구를 찾아 그 허전한 마음을 채워 보자며 같은 철학자인 김태길 교수에게 연락을 했더니김 교수는 한참 생각에 잠기다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했다.

다 좋은데… 이런 생각도 해보셨어요우리 셋이 이미 팔순을 넘겼는데 언제 자연의 순리를 따라 누가 먼저 가게 될지 모르잖아요.…… 이제 다시 깊은 정을 쌓았다가 다가오는 사태를 어떻게 견디려고 그러세요.”

차라리 떨어져 지내다가 누가 먼저 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크게 흔들리거나 허무하게 허덕이는 일이 적을 것 같다는 게 김태길 교수 생각이라는 것이다그럴까우리도 정을 자꾸 깊여 가다가 그 사태(?)를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이르게 될까그러나 인생의 황금기는 60세부터 75세 사이라는 김형석 교수의 말씀대로라면 우린 아직 그 황금기를 조금은 안고 있지 않은가아직은 정 나누며 살 시간을 그리 야박하게 죄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넷이 만나 우리의 가는 황금기를 더욱 따뜻하게 구가해 볼 일이다그 황금의 추억을 가득 안고 세상을 바꾸어 가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까.안락한 잠이 상쾌한 아침을 맞게 하듯 즐거운 추억이 유쾌한 다음 생을 기약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같이 만나세정다운 친구여!(2019.1.12.)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의 삶  (0) 2019.02.10
견일영 선생님의 묵언행  (0) 2019.01.24
나무의 사랑  (0) 2019.01.05
겨울 산의 온도  (0) 2018.12.23
아버지와 딸 그리고 눈물  (0) 2018.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