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아버지와 딸 그리고 눈물

이청산 2018. 12. 5. 13:59

아버지와 딸 그리고 눈물

 

 

살아오면서 슬프고 안타까운 처지나 장면을 마주했을 때 눈물을 흘리거나 속눈물을 삼키고는 했지만나에게 그런 눈물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세상의 풍진을 겪을 만큼 겪은 세월을 살아온 것 같고그리하여 흘릴 눈물도 별로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은 같은데노래 한 곡에 왜 그리 눈물이 나는 걸까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들을 때마다 추스르기 어려운 눈물이 솟는다.

구순에 가까운 노가객과 중년의 여가수가 애잔하게 부르는 아버지와 딸이라는 노래가 나를 울린다노래가 심금을 울릴 때는 사와 곡이 하나로 어우러져야 하는 것이거늘그 노랫말이며 곡조가 어찌 그리 아릿하게 들어와 박히는지 누선을 저리게도 자극한다.

딸 역할의 여가수가 먼저 부르는 그 노래는 내가 태어나서 두 번째로 배운 이름 아버지가끔씩은 잊었다가 찾는 그 이름우리 엄마 가슴을 아프게도 한 이름그래그래도 사랑하는 아버지라며 이어지는 노랫말을 애틋한 가락에 실어 애잔하게 풀어내고 있다.

두 번째로 배운 이름이란다그래첫 번째는 당연히 엄마겠지그 두 번째 이름이란 가끔씩은 잊힐 수도 있겠지그 이름이 엄마 가슴을 아프게도’ 했단다여느 집도 그런 일이 있는 걸까내가 저들을 힘들게도 했지만제 어미의 가슴도 참 많이 아프게 한 것 같다.

아이들은 그런 나를 원망도 많이 했을 것이다나를 더욱 울린 건 그 다음 말이다. ‘그래그래도 사랑하는 아버지란다그래도 아버지라고……뗄 수 없는 혈육의 정 때문일까중년을 살고 있는 내 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모든 원망을 묻고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딸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그러기를 어찌 바랄 수 있으랴그 다음 구절에서는 더욱 처연한 눈물이 솟는다. ‘세상 벽에 부딪혀 내가 길을 잃을 땐우리 집 앞에 마음을 매달고힘을 내서 오라고 집 잘 찾아오라고밤새도록 기다리던 아버지……’ 가수의 목소리는 토혈을 할 듯이 애달파진다.

내 딸이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마주했을 때나는 딸을 위해 집 앞에 메달 마음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무엇이 딸의 행복을 지켜줄 수 있는 길인지를 모른 채 애만 태우고 있었다아무리 애가 탄들 그 마음이 딸에게 무슨 소용이 될 수 있었단 말인가딸은 그렇게 물색없는 아비를 또 얼마나 원망했을까.

내가 시집가던 날 눈시울을 붉히며잘 살아라 하시던 아버지……’ 나도 딸아이가 시집가던 날은 눈자위를 적시며 가서 잘 살아라고 했었지만어느 아빈들 그러지 않았을까딸아이 시집갈 때 내가 흘렸던 눈물을 생각하니그 눈물이 지금 나를 또 눈물겹게 하고 있다.

딸아그 다음 노랫말은 내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하겠다네가 태어날 때며 그리고 어느새 자라 아장아장 걸을 때그렇게 귀엽고 예쁠 수가 없더구나그렇게 여기는 마음만으로 너를 깊이 사랑했다 할 수 있겠느냐지금 생각하면 난 참 데생각한 부모였던 것 같다나는 아이는 어미가 다 키우는 걸로만 알고 무심만 했으니 말이다.

오직 집안 생계를 일으키고 지키는 일만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지만그것이야 어느 아빈들 그렇게 하지 않았을 일일까.그러면서도 버젓이 일군 것도 없고잘 지켜낸 것도 없으니 내 지금 무슨 말을 할 수 더 있을까.

내가 딸에게 알뜰히 해준 것도 없고딸이 아비에 대한 살뜰한 정회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우린 서로 살갑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렇게 지내다가 딸은 제 짝을 찾아갔다그런데 딸이 결혼식을 하던 날 예식장에서, ‘이제 딸은 둥지를 떠나 새로운 세계를 찾아간다.’는 주례의 말씀을 듣는 순간 왜 그리 눈물이 났던 걸까.

그날 이후로는 잘 살기를 바랄 뿐이제 아들이든 딸이든 저들의 일은 저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며 잊고 살았다딸이 시집을 간 지 몇 해가 흐른 어느 날딸이 두고 간 책에 끼여 있던 꽃잎 갈피를 보며 눈시울을 뜨거워했던 적이 있었지만그리고는 또 잊고 살았다그렇게 저들도 나이가 여물어가는 사이에 내 삶도 땅거미를 향해 저물어갔다.

저들이 잘 살면 좋고잘못 살아도 내가 어찌 해줄 수 없는 일이 아닌가어차피 제 노릇 해야 할 나이에 이르면 누구든 행불행을 스스로 갈무리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그렇게 애써 무심하려 했다그런데 오늘 이 노래가 나를 울린 건 무엇 때문일까어느 소설가가 사람은 기억 때문에 슬프다세상은 흘러가도 기억은 남는다.(최인훈 화두)”고 했듯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지난날의 아린 기억 때문일까.

젊은 아비일 때는 흘릴 줄 몰랐던 눈물일지도 모르겠다삶을 겪어오는 사이에 미처 다독여 여밀 줄 몰랐던 아프고 안타까운 일들이 이제야 생채기가 되어 살아나는 것인가내가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되었을지도 모르고아이들이 목말라 했던 것을 내가 잘 알아채지도 못한 채 살았던 젊은 아비의 민연한 시절이 아리게 돌아보인다.

어찌 내가 바랄 수 있는 일일까노래의 끝자락에 나오는 아무리 바빠도 얼굴 한번 봅시다./ 만나서 차 한 잔 합시다.’라며 딸과 그리운 친구처럼 불러 마음을 나눌 수가 있는 일일까그 구절마저 다시 눈물을 솟구치게 한다.

젊을 때는 흘릴 줄 몰랐던 눈물-. 문득 새는 죽을 때에 이르면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사람은 죽을 때에 이르면 그 말이 선해진다.”(鳥之將死 其嗚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論語≫)라는 말이 떠오른다이제 나도 그 어름에 이르고 있는 건가.

이 노래를 다시 들어도 누선을 진정시키기가 어렵다.

오늘 나의 이 늙은 눈물은 무엇인가.(201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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