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겨울 산의 온도

이청산 2018. 12. 23. 11:22

겨울 산의 온도

 

겨울 길을 나선다철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철 속을 걷고 있는 나의 걸음이다오늘은 바람 찬 겨울 길이다들길을 걷고 산길을 오른다들길도 산길도 나의 길이련만겨울 길은 이방과 동방의 길이 함께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겨울 들길은 스산하다그 풍요로웠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모든 것이 거두어져버린 들판은 황량하다들판을 채웠던 모든 것들은 힘들여 가꾸어진 것들이라 가꾼 이들이 거두어가게 마련이지만모든 것을 다 주어버리고 허허로워진 들판에 감도는 기운이란 싸늘하게만 와 닿는다.

저 흙 속에서도 생명 작용은 일고 있을까철이 바뀌면 새로운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고 나와 대지의 기운을 호흡할 수 있을까거두고 남겨진 그루터기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그 들판에는 바람도 머물 곳을 몰라 헤매고 있는 것 같다바람의 결이 무엇을 향한 질타처럼 매섭다이방의 낯선 길 같은 들길이다.

들길을 지나 산길로 든다한 발 한 발 올려 딛는다철이 변해 있는 건 산도 마찬가지다화사하게 피어났던 산꽃이며 무성한 그늘을 드리웠던 녹엽들은 다 어디를 갔는가앙상한 가지들만이 빈손을 젓고 있다그래도 나무들이 반갑다어제 보던 그 나무들이 아닌가언제나 반가운 손길을 보내주던 그 가지들 아닌가.

이 산엔들 어찌 바람이 없을까때로는 사납기도 한 큰바람이 몰아쳐 더러는 가지를 꺾어버리고 잎을 황망히 지게도 했을 것이다그러나 나무는 바람은 너그러이 맞아준다휘파람을 불 듯 가벼이 숨 돌릴 자리도 준다그러다 보면 바람도 순해져 어느새 나무와 친구가 된다.

바람과 빛살에게 자리를 내어주거나 제 한살이를 다하여 가지를 떠난 꽃이며 잎들은 멀리 가지 않았다제 살던 그 나무 아래저를 자라게 한 그 흙 위에 옹기종기 오순도순 내려앉아 있다서로 어깨를 겯기도 하고 땅에 살을 붙이기도 하면서 가지에 걸린 빛살이며 바람을 고즈넉이 즐기고 있다.

그 빛살이며 바람도 또한 공으로 가지에 앉아 있는 게 아니다철되면 피어날 새순이며 새잎을 위하여 둥치를 안아주고 가지를 매만져주고 있다가지들은 이따금 가려운 듯 몸을 흔들어대기도 하지만이내 제 자리로 돌아와 잎이 남기고간 떨켜를 보듬는다.

겨울 산은 따뜻하다질펀히 비어버린 들판보다도담벼락 돌아드는 고샅보다도 산은 따뜻하다산이 바람을 안아주기 때문일까나무가 바람을 재워주기 때문일까바람이 산의 큰 가슴을 어찌 넘어설 수 있을까나무들의 너그러운 손길을 어찌 마달 수가 있을까.

한 발 한 발 오르는 걸음에 떨어진 잎들이 닿는다사각사각 포근포근 그 소리며 느낌이란 어찌 그리 정겹고 따스한가잎이 지상에 내릴 때,다른 것은 다 두고 정만 가지고 내린 것 같다내리면서 두고 온 엽흔(葉痕)도 바로 사랑이 아니던가다음 생을 위한 자정(慈情같은 마음 씀이 아니던가.

그 흔적으로 새순이 돋고 새잎이 날 자리를 닦아주어 나무는 숱한 세월을 살아도 늙지 않게 하는 것이다나무의 무궁한 내력을 지켜 주는 것은 커다란 둥치며 억센 가지가 아니라 저의 따사로운 손길임을 떨어진 잎은 아는 체도 하지 않는다저의 오롯한 천생일 뿐이다.

그 뿐인가떨어진 잎은 그냥 땅 위에 앉아 있는 게 아니다겁의 세월을 살아갈 둥치를 위하여그 위의 크고 작은 수많은 가엽(柯葉)들을 위하여거기에 필 꽃들을 위하여 쉼 없는 역사를 하고 있다어쩌면 그걸 위해 잎들이 떨어져 내려앉은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잎과 잎들이 서로 만나 무성했던 시절을 회억도 하면서 다시 저들의 본향으로 돌아갈 날을 그리기도 하고그 귀향을 위해 내려앉은 걸 새삼스레 돌아보기도 하면서저들끼리 손을 맞잡고 우리 다시 만나자.’ 씽긋 눈웃음도 지으며우람한 둥치의 자양이 되려 땅속 깊숙이 스며든다.

아니다바로 땅이 된다흙이 된다그 흙이 꽃을 만들고 잎을 만들고,늙지 않는 나무가 되게 하는 것이다잎들은 기꺼이 흙의 살이 되고 피가 된다그 흙의 살이 꽃이 되고 잎이 될 것임을 마른 잎들은 오랜 이력으로 깨닫고 있다아니다그냥 그렇게 그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이제 이 마른 잎은 다시 꽃으로 잎으로 피어날 것이다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그 자양이며 희원(希願)이 어디로 갈 것인가나무는 뿌리며 둥치며 줄기며 가지에 이르기까지 저들 힘으로 사는 게 아니다그 가지의 끝에 피어난 잎이 없으면제 한살이를 다 하고 떨어지는 잎이 없으면 무엇으로 근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제야 알겠다겨울 산이 따뜻한 까닭을!스스로 몸과 마음을 녹여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저 가랑잎 때문인 것을,그 작업을 위하여 불태우는 가랑잎들의 열정이 겨울 산을 따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을 몸으로 느껴 알겠다그로 하여 산의 가슴을 넉넉하게 하고나무를 너그럽게 하고 있음을 알겠다.

산길을 걷는다발에 와 닿은 가랑잎들의 운김이 정든 이의 몸결처럼 보드랍고 포근하다마치 그리는 이를 향하는 순정 같기도 하다그 정이 산을 온기에 젖게 한다그 정이 아니면 어찌 새 잎을 빚어낼 수 있을까새 철을 맞이하게 할 수 있을까그 온기를 따라 아늑히 묻혀들고 싶다겨울 산의 온도는 몇 도일까.

사랑하는 사람아우리도 이 겨울 산처럼 따뜻할 수 있을까우리도 봄이 오면 새 꽃 새잎 되어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2018.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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