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슬프고 안타까운 처지나 장면을 마주했을 때 눈물을 흘리거나 속눈물을 삼키고는 했지만, 나에게 그런 눈물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세상의 풍진을 겪을 만큼 겪은 세월을 살아온 것 같고, 그리하여 흘릴 눈물도 별로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은 같은데, 노래 한 곡에 왜 그리 눈물이 나는 걸까,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들을 때마다 추스르기 어려운 눈물이 솟는다. 구순에 가까운 노가객과 중년의 여가수가 애잔하게 부르는 「아버지와 딸」이라는 노래가 나를 울린다. 노래가 심금을 울릴 때는 사와 곡이 하나로 어우러져야 하는 것이거늘, 그 노랫말이며 곡조가 어찌 그리 아릿하게 들어와 박히는지 누선을 저리게도 자극한다. 딸 역할의 여가수가 먼저 부르는 그 노래는 ‘내가 태어나서 두 번째로 배운 이름 아버지/ 가끔씩은 잊었다가 찾는 그 이름/ 우리 엄마 가슴을 아프게도 한 이름/ 그래그래도 사랑하는 아버지’라며 이어지는 노랫말을 애틋한 가락에 실어 애잔하게 풀어내고 있다. 두 번째로 배운 이름이란다. 그래, 첫 번째는 당연히 ‘엄마’겠지. 그 두 번째 이름이란 가끔씩은 잊힐 수도 있겠지. 그 이름이 ‘엄마 가슴을 아프게도’ 했단다. 여느 집도 그런 일이 있는 걸까. 내가 저들을 힘들게도 했지만, 제 어미의 가슴도 참 많이 아프게 한 것 같다. 아이들은 그런 나를 원망도 많이 했을 것이다. 나를 더욱 울린 건 그 다음 말이다. ‘그래그래도 사랑하는 아버지’란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뗄 수 없는 혈육의 정 때문일까. 중년을 살고 있는 내 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모든 원망을 묻고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딸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그러기를 어찌 바랄 수 있으랴. 그 다음 구절에서는 더욱 처연한 눈물이 솟는다. ‘세상 벽에 부딪혀 내가 길을 잃을 땐/ 우리 집 앞에 마음을 매달고/ 힘을 내서 오라고 집 잘 찾아오라고/ 밤새도록 기다리던 아버지……’ 가수의 목소리는 토혈을 할 듯이 애달파진다. 내 딸이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마주했을 때, 나는 딸을 위해 집 앞에 메달 마음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이 딸의 행복을 지켜줄 수 있는 길인지를 모른 채 애만 태우고 있었다. 아무리 애가 탄들 그 마음이 딸에게 무슨 소용이 될 수 있었단 말인가. 딸은 그렇게 물색없는 아비를 또 얼마나 원망했을까. ‘내가 시집가던 날 눈시울을 붉히며/ 잘 살아라 하시던 아버지……’ 나도 딸아이가 시집가던 날은 눈자위를 적시며 ‘가서 잘 살아라’고 했었지만, 어느 아빈들 그러지 않았을까. 딸아이 시집갈 때 내가 흘렸던 눈물을 생각하니, 그 눈물이 지금 나를 또 눈물겹게 하고 있다. 딸아, 그 다음 노랫말은 내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하겠다. 네가 태어날 때며 그리고 어느새 자라 아장아장 걸을 때, 그렇게 귀엽고 예쁠 수가 없더구나. 그렇게 여기는 마음만으로 너를 깊이 사랑했다 할 수 있겠느냐. 지금 생각하면 난 참 데생각한 부모였던 것 같다. 나는 아이는 어미가 다 키우는 걸로만 알고 무심만 했으니 말이다. 오직 집안 생계를 일으키고 지키는 일만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지만, 그것이야 어느 아빈들 그렇게 하지 않았을 일일까.그러면서도 버젓이 일군 것도 없고, 잘 지켜낸 것도 없으니 내 지금 무슨 말을 할 수 더 있을까. 내가 딸에게 알뜰히 해준 것도 없고, 딸이 아비에 대한 살뜰한 정회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린 서로 살갑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내다가 딸은 제 짝을 찾아갔다. 그런데 딸이 결혼식을 하던 날 예식장에서, ‘이제 딸은 둥지를 떠나 새로운 세계를 찾아간다.’는 주례의 말씀을 듣는 순간 왜 그리 눈물이 났던 걸까. 그날 이후로는 잘 살기를 바랄 뿐, 이제 아들이든 딸이든 저들의 일은 저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며 잊고 살았다. 딸이 시집을 간 지 몇 해가 흐른 어느 날, 딸이 두고 간 책에 끼여 있던 꽃잎 갈피를 보며 눈시울을 뜨거워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리고는 또 잊고 살았다. 그렇게 저들도 나이가 여물어가는 사이에 내 삶도 땅거미를 향해 저물어갔다. 저들이 잘 살면 좋고, 잘못 살아도 내가 어찌 해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어차피 제 노릇 해야 할 나이에 이르면 누구든 행불행을 스스로 갈무리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애써 무심하려 했다. 그런데 오늘 이 노래가 나를 울린 건 무엇 때문일까. 어느 소설가가 “사람은 기억 때문에 슬프다. 세상은 흘러가도 기억은 남는다.(최인훈 「화두」)”고 했듯,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지난날의 아린 기억 때문일까. 젊은 아비일 때는 흘릴 줄 몰랐던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삶을 겪어오는 사이에 미처 다독여 여밀 줄 몰랐던 아프고 안타까운 일들이 이제야 생채기가 되어 살아나는 것인가. 내가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아이들이 목말라 했던 것을 내가 잘 알아채지도 못한 채 살았던 젊은 아비의 민연한 시절이 아리게 돌아보인다. 어찌 내가 바랄 수 있는 일일까. 노래의 끝자락에 나오는 ‘아무리 바빠도 얼굴 한번 봅시다./ 만나서 차 한 잔 합시다.’라며 딸과 그리운 친구처럼 불러 마음을 나눌 수가 있는 일일까. 그 구절마저 다시 눈물을 솟구치게 한다. 젊을 때는 흘릴 줄 몰랐던 눈물-. 문득 “새는 죽을 때에 이르면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에 이르면 그 말이 선해진다.”(鳥之將死 其嗚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 ≪論語≫)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제 나도 그 어름에 이르고 있는 건가. 이 노래를 다시 들어도 누선을 진정시키기가 어렵다. 오늘 나의 이 늙은 눈물은 무엇인가.♣(2018.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