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지고 있다. 꽃보라가 눈가루처럼 날린다. 한 열흘 해사하고 찬란하게 보냈다. 열정을 다해 살았다. 꽃을 보내고 있는 나무는 잎을 피울 채비를 하고 있다. 조금 성미 급한 가지에서는 벌써 파란 촉을 내밀기도 했다. 
나무는 모든 힘을 꽃 피는 데에만 모았다. 가지가 어떻게 벋어도, 겨울 모진 바람에 살갗이 터서 갈라져도, 속이 타 텅 빈 가슴 드러나도 오직 꽃피우는 데에만 온 심력을 쏟았다. 봄은 전쟁처럼 온다더니 그렇게 오는 봄과 더불어 벚꽃은 무슨 폭격처럼 일시에 천지를 휘덮었다. 떨어져도 여한은 없을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바쳐 폭발하듯 꽃을 피워냈는데 무슨 남을 한이 있을까. 피운 꽃 위로 비바람이 몰아쳐 와도 제 피워낸 세상을 초연히 관조하다가 화기가 다했다 싶으면 미련 없이 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꽃은 생명의 한 때를 찬연하게 장식했다. 흘러가는 시간의 한 마디를 찬란하게 꾸몄다. 그 꽃을 보며 묵상한다. 나는 그래 본 적이 있는가, 언제 그렇게 눈부신 열정을 피워본 적이 있었던가.떨어져가도 여한이 없을 만큼 찬란히 살아 본 적이 있었던가. 시인은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벚꽃을 보면/ 세상만사 줄을 놓고,나도 꽃잎 따라 낙하하고 싶구나.’(김종해, ‘모두 허공이야’)라고 했다.온몸을 다 던져 피어나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줄을 놓아도 아쉬움이란 없겠기 때문일 것이다. 벚꽃이 그랬던 것처럼. 벚꽃이 찬연하게 피어나 미련 없이 져갈 무렵,세상의 줄 하나를 놓았다. 져가는 벚꽃처럼 미련 깨끗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필 때 뜨거운 불꽃으로 피어났듯이 질 때도 식지 않은 불꽃으로 떨어지고 싶었다.
글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다. 부지런히 읽고 썼다. 날을 정하여 쓴 것을 들고 모였다. 서로의 뜻을 주고받으며 생각을 모으고 녹여 한 편 한 편의 글들을 만들어 나갔다. 그 한 편을 향하여 아낌없는 열정을 바쳐나갔다. 개화를 위해 전력하는 벚나무 같이. 시간이 쌓이는 사이에 글도 쌓이고 글을 향한 열정도 점점 뜨거워갔다. 그 글들을 우리만 볼 것이 아니라 이웃들과도 나누어 보며 더 빛나는 사념들을 모아보자 했다. 글 무리도 짓고, 마침내 한 권의 결실로 묶기에 이르렀다. 남은 생애의 한 보람으로 걸고 싶었다. 꽃이 폭발하듯 활짝 피는 것 같았다. 피어났다. 피어난 것에 대해 감탄도 했다. 저 벚꽃도 그랬을까. 몸을 돌보지 않고 꽃 피우기에만 불같은 마음을 모으느라 그 몸의 상처는 차마 살피지 못했을까. 우리가 피워낸 꽃에도 생채기가 없지 않았다. 아집과 오만이란 사람만의 것일까. 사랑도 믿음도 자신의 아집을 위해서는 가무려 버릴 수 있는 것은 사람만의 오만일까. 저 꽃들 중에도 지난날의 사랑이며 믿음을 다 버리고 자신의 꽃부리만을 우뚝 세우려 했던 꽃잎이 있었을까. 저 꽃들 중에도 그런 꽃이 있을까. 제 활짝 피기 위해 세상 한 귀에 아린 얼룩을 지은 애연한 영혼의 갈 길을 위해, 먼저 허공의 길을 나선 꽃이 있을까. 그 누구에게 아무런 계시가 되지 못할지언정 꽃 이파리 하나가 뛰어내렸다. 한 세상의 한 줄을 놓았다.
꽃잎이 날린다. 저마다의 문자를 그리며 날리고 있다. 시인은 또 흩날리는 꽃잎을 보며 ‘꽃잎 한 장 한 장마다/ 무슨 절규,무슨 묵언 같기도’(위의 시)하다 했지만, 그 ‘절규’며 ‘묵언’이란 살아온 세상에 대한 오도송(悟道頌)일지언정 불태웠던 세상에 대한 미련이기야 할까. 그 한 세상의 줄을 놓을 때는 더 진득히 이루지 못한 꿈에 남은 한이야 청량해지지 않지만, 깨끗한 소멸을 새기고 싶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이형기, ‘낙화’)의 아름다운 뒷모습으로 남기를 바랐다. 가고 오는 것이야 삶의 다반사가 아니던가.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초월적인 진리를 돌이키지 않더라도, 영원히 머물 세상이 어디 있으며 돌아오지 않는 세상 또한 어디 있는가. 가고 오는 것에 구차할 일이 있을까.
어쩌면 모든 것들의 생애라는 것은 가고 오기를 거듭하고, 보내고 맞기를 되풀이하면서 엮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들 제 한 생애를 두고 숱한 세월을 보내고 수많은 나달을 맞이하지 않을까. 그 세월 속에서 온갖 사연을 묻고 갖은 사실을 일구며 살아간다. 그 세월은 언제나 소리 없이 겸손하게 오고 욕심 없이 겸허하게 간다. 세월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자국을 남기는 것은 오직 사람의 일일 뿐이다.그 세월 앞에서 무슨 오만을 부릴 수 있을까. 저 꽃잎처럼 날려 내려앉을 뿐인 것을-.
벚꽃이 진다. 꽃 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파란 잎새가 뾰족한 촉수를 내밀며 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저도 그런 한때가 있어야겠지. 모든 것이 한 시절의 일이 아니던가. 저도 가고 꽃은 또 필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흘러가고 있다. 그렇게 꽃보라가 날리고 있다.♣(2018.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