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는 용하다

이청산 2018. 2. 25. 12:37

나는 용하다

 

사전을 보면 용하다는 말에는 1」 재주가 뛰어나고 특이하다2기특하고 장하다3」 매우 다행스럽다.’ 등의 뜻이 있는 걸로 풀이되어 있다이 말을 두고 나를 보면 12의 뜻은 전혀 해당이 안 되는 것 같고3의 뜻에는 내 삶이 조금은 가닿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나긴 했지만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마음과 몸의 구조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것 같다.살아오면서 그 구조를 갖추기 위한 노력에 전심하지도 않은 것 같다그래서인지 생애의 저물녘을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리 잘 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저마다의 가치관이며 인생관에 따라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이를테면 학문적예술적으로 일가를 이루어 삶을 빛나게 할 수도 있고사회적가정적으로 관계를 잘 이루어 그로 인한 행복과 평안으로 삶의 의의를 새길 수도 있고이재(理財)와 치세(治世)에 능란하여 부와 명예며 권세를 구가하는 것으로 삶의 가치를 헤아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내 살아온 일을 돌아보면 그 삶의 방법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어 낸 것이 없다.학문과 예술로 경지를 이루기에는 재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집요하지도 못했고푼푼한 인품과 도량으로 사람 사이를 잘 건사하여 그 따스함을 느꺼워하며 살아오지도 못했고세상살이 재주가 남달라 재물로 유족을 누리거나 명예로 세인의 우러름을 받는 일은 더욱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삶을 추구하고 누리면서 살아가자면그에 필요한 지혜랄지 능력이랄지 그런 것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면 살아가면서라도 갈고닦아 갖출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선천이든 후천이든마음의 것이든 몸의 것이든 그러한 재질을 갖지 않고서야 어찌 잘 살기를 바랄 수 있을까나는 생각이 그 재질의 성취를 위한 노력을 받쳐주지도 못했고몸이 기민하여 그 생각들을 담아내는 충실한 그릇이 되게 하지도 못했다.

세상의 하고많은 재화 중에 다만 얼마치라도 나의 부가 되게 하는 재주도 별로 없었다어찌하다 재물을 좀 마련해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다보면내가 이로움을 얻기보다는 남이 이롭게 되는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나의 아량이 넓고 이타심이 깊어 그렇게 된 일은 전혀 아니다나의 능력이며 판단력이 따라주지 못했던 결과였을 뿐이다.

딴은 부지런히 한다며 해낸 일이라 할지라도내가 하는 일에는 사회적 혹은 인간적인 영예 같은 것은 그다지 따라주지 않았다물론 무얼 바라 한 일은 아니었지만이룩해 내는 일의 결과로 무엇이라도 얻어지는 게 아니던가인품으로든 과업으로든 내가 하는 일들이 내 영예가 되게 하는 품성이며 지혜 같은 것이 나에게는 없었던 것 같다.

설령 어떤 일을 해낼 그 당시에는 최선이라 생각했던 것일지라도지나고 보면 어설픈 실수에 지나지 않는 일이 많았다민망함과 부끄러움으로 지난 일을 새겨야 했던 일들이 적지 않고 보면영예가 아니라 비소를 받아도 하릴없는 일이다나에게는 사회 일도 가족 일도 버젓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까닭이다.

사랑하여 하는 일일지라도 그런 일들을 빛나게 해내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내가 좋아하여 쓰는 글도 그러할 뿐만 아니라생애를 얽어가는 여러 일들에도 별 재주를 갖지 못한 채 거저 반거충이로 살아온 것 같다그러니 어찌 명예며 존경 같은 것들이 나를 따르기를 바랄 수가 있겠는가.

나의 몸도 그랬다특별한 몸 재주며 잘할 수 있는 운동도 없고운동에 대한 취미도 없다몸이 지닐 수 있는 기능의 모든 것이란 남에게 늘 처지기만 했다오직 걷는 것으로 몸과 마음의 운동을 삼을 따름이다.그러면서도 젊은 시절 삼 년의 군대 생활을 해낸 것은 내 생애가 이룩해낸 기적의 하나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참 용하다그토록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능력이며 지혜가 없으면서도 세월의 거친 파도를 타고 넘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얼마나 용한가밥이 없어 굶어본 적도 없고집이 없어 거리에 나앉아본 적도 없고사회적인 할 일을 얻지 못해 헤맨 적도 없고구할 사람을 찾지 못해 찌든 적도 없다.

다만, ‘사람은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는 톨스토이의 말처럼 그 모든 것이 내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라 생각하며 살아왔을 뿐이다.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 여기며 분수없는 욕심을 내지 않으려 했을 따름이다운명 아닌 일에 욕심을 부려본들 무엇이 나의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삶에 대한 번민이며 고뇌가 왜 없었을까때로는 내가 저질러놓은 과오에 스스로 매몰되어 허우적이기도 하고얽힌 관계의 구렁에서 헤어나지 못해 긴 밤을 잠 못 이루며 가슴 뜯어야 했던 적도 없지 않았다그러한 것들도 어찌어찌하여 헤쳐 나왔다그리고 별일 없다는 듯 살아왔다그러다가 다시 번뇌의 늪에 잠겨 뒤척이는 밤을 또 새울지라도-.

이제 이 세상의 햇빛을 받을 날이 얼마나 나의 것이 될지 모르겠다그 남은 날에도 번민과 고뇌는 나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지금까지 용하게 살아왔듯앞으로도 그렇게 살다가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만은 버리고 싶지 않다.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버젓하게 이루어 놓은 일 하나 없을지라도번듯하게 일구어 놓은 재물이 없을지라도 이 땅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있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질 뿐이다.

내 이리 살아있음이 참으로 용하지 않은가.(2018.2.17.)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이 아늑한 까닭은  (0) 2018.03.25
길 찾아 가는 길  (0) 2018.03.14
도데의 선녀  (0) 2018.02.08
박수칠 때 떠나라  (0) 2018.01.28
어느 어머니의 유언 (낭독)  (0) 2018.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