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둑길을 걷는다. 아침이면 거니는 산책길이다. 봄이면 해사하고 화사한 꽃으로 강둑을 수놓던 벚나무가 여름에는 무성한 녹음으로 청량한 그늘을 지우더니, 지금은 시나브로 붉은빛 노란빛으로 잎의 빛깔을 바꾸면서 한두 잎씩 땅 위로 내려 앉힌다. 봄이 오면 새잎 나고 꽃 피고, 짙푸르게 우거지는 여름을 지나 가을이면 떨켜로 하여금 찬란한 빛을 뿌리게 하다가 잎 다 진 가지에 또 새 것들을 예비할 것이다. 저 생명의 끝은 어디일까. 저 나무에는, 아니 세상의 모든 나무에 생명의 끝이란 게 있을까.
저 나무가 꽃 피우고 잎 돋우는 일에 오로지 몰두하다가 모든 힘과 정을 다 쏟고 넘어진다 할지라도, 넘어져 땅속으로 든다 할지라도, 그것은 또 움이 되고 싹이 되어 다시 세상으로 나올 것이다. 새로운 꽃을 피우고 잎을 돋울 것이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생명 작용에 어찌 끝이 있을 것인가.![](http://lib7269.cafe24.com/images/chungwoohun3/lnd04.jpg) 저 생명의 순환을 보면, 나무에게는 삶과 죽음이 따로 있는 것 같지 않다. 어찌 나무만일까. 저 풀이며 들꽃인들, 저 짐승들이며 인간인들 어찌 삶과 죽음이 따로 있을까. 태어나는 것은 곧 죽음으로 가는 길이고, 죽음은 곧 새로 태어나는 길이 아닌가. 일찍이 장자(莊子)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한결 같은 것’[萬物齊同]이라며,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은 없고, 칠백여 년을 살았다는 팽조(彭祖)가 일찍 죽은 자일뿐이라고 했다. 일찍 죽은 사람이 가장 오래 산 사람이고, 오래 산 사람이 가장 일찍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삶과 죽음은 한 가지라는 것을 에둘러 한 말일 것이다. ‘사람은 왜 세상에 태어났을까?’를 돌아볼 때가 있다. 이를 궁리하던 어떤 철학자는 인간을 ‘던져진 존재’라고 정의했다. 태어나기를 원했던 것도 아니고, 태어나는 시간과 장소, 삶의 방법을 스스로 선택한 것도 아니고, 주어졌거나 이미 결정되어 있는 시간과 장소, 정해진 환경 속에 던져진 것처럼 태어나기 때문이라 했다. 그렇기도 하겠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란 저 나무처럼 봄이면 잎이 돋고 꽃이 피듯 그 자연의 흐름을 따라 생사를 거듭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나고 죽는 것도 스스로 가리고 따져서가 아니라, 자연이 마련해 놓은 이치를 따라 나고 죽는 것이 아닐까. 그 이치에 따라 나고 죽을 때라야 본연의 생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날에도 맑은 날이 있고 흐린 날이 있듯이, 땅에도 큰 나무가 있고 작은 풀이 있듯이 오래 사는 사람도 있고 일찍 죽는 사람도 있는 것이 모두 자연의 일이라 할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한 가지라면 길고 짧음 또한 한 가지가 아니랴. 언제든 낙엽 지듯 떨어졌다가 다시 꽃이 피듯 새 세상을 맞을 일일 뿐이다.![](http://lib7269.cafe24.com/images/chungwoohun3/lnd03.jpg) 이렇듯 생사가 자연의 이치 속에 있음에야, 누군들 무엇인들 자연을 벗어나 나고 죽기를 도모할 수 있을까. 설혹, 사람의 삶이란 저 푸나무며 짐승들과는 달라서 자기가 가질 수 있는 의지에 따라 행불행을 달리할 수도 있다할지라도,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고서야 어찌 행불행을 나누어 바랄 수 있을 것인가. 어느 소설가는 그의 소설 속에서, 이승에서의 죽음은 저승으로의 탄생이고 저승에서의 죽음은 이승으로의 탄생이며, 반대로 이승으로의 탄생은 저승에서의 죽음이고 저승으로의 탄생은 이승에서의 죽음이라면서‘탄생과 죽음은 의미가 다르지 않다.’고 역설하고 있다.(이외수, ‘괴물’)이승과 저승도 하나고, 탄생과 죽음도 하나라는 말이겠다. 생과 사가 하나일 바에야 탄생을 환호할 일도 아니고, 죽음을 비탄할 일도 아니다. 태어남이 기쁜 것이면 죽음도 기쁜 것이고, 태어남이 축복이면 죽음도 축복이다. 장자는 아내가 죽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고 하고, 맹손재(孟孫才)는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조금도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태어남도 죽음도 다 같은 자연의 일로 서로 다름이 없기 때문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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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어느 신문은 아들 넷을 신부로 키운 한 할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할머니가 신부 아들에게 ‘내 장례미사 때 강론 시간에 신자들을 한바탕 웃겨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하느님 곁으로 가는 기쁜 날, 신자들을 울려선 안 된다는 뜻이라 했다.(조선일보 2017.10.27.) 이 또한 죽음을 축복으로 여기는 마음일 것이다.
낙엽이 지고 있는 강둑길을 걷는다. 조용히 흔들리는 갈대 숲 사이로 물은 맑게 흐르고, 둑 위의 벚나무는 소리 없이 마른 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저 물은 흘러서 어디로 가고, 저 잎은 날려서 어디로 가는가. 갈 데까지 가다가 물은 물로 다시 태어나고 잎은 잎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저 물은 언젠가는 강을 다시 흐를 것이고, 저 잎은 다시 잎이 되고 꽃이 되어 나무를 꾸밀 것이다. 저들에게 어찌 삶과 죽음이 따로 있으랴. ![](https://t1.daumcdn.net/cfile/blog/9905B53359ED57B434)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내 가는 길이 설령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 할지언정, 내 마지막 닿을 곳이 죽음이라 할지언정,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듯 몸치장을 달리할 뿐이지 않는가. 저 물이 새 물이 되고, 저 잎이 새잎이 되듯이. 떨어진 잎을 하나 줍는다. 내년 봄의 새잎 새 꽃을 보고, 나의 새 얼굴 새 모습을 본다. 하나로 새겨져 있는 삶과 죽음의 모습을 본다.♣(2017.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