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풀베기

이청산 2017. 9. 30. 12:28

풀베기

 

강둑 풀숲 길을 걷는다날마다 아침이면 걷는 나의 산책길이다숲에 우거진 풀들은 잎을 피워낼 뿐 아니라 저마다의 모양과 빛깔을 가진 꽃들을 빚어낸다꽃이 없는 풀이 없고풀이 없는 꽃이 없다모든 풀이 곧 모든 꽃이다.

요즈음은 메꽃이며 미국나팔꽃과 함께 유홍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다조그만 나팔꽃처럼 생긴 꽃잎의 선연한 다홍빛이 눈이 아릴 듯 고와 저를 향하고 있는 내 얼굴도 발갛게 물들 것 같다.

며느리밑씻개줄기에는 사나운 가시가 수없이 돋아나 있고고약한 이름에 아름답지 못한 전설도 간직하고 있는 꽃이지만 별사탕같이 생긴 옅은 분홍색 꽃이 앙증맞게 피어 슬며시 미소를 머금게 한다물봉선이며 고마리도 한껏 정취를 돋운다.

이런 꽃들을 보면서 길을 걷노라면 마치 꿈길 속을 사분사분 걷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별 밭을 유영하는 듯도 하여 몸도 마음도 날듯이 경쾌해진다.이런 풀꽃들을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 편하게 두고 볼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맙고도 삽상한 일일까.

여름내 자란 풀이 산야에 무성하다산에는 언제나 청초해야 할 무덤에 풀들이 자욱하고들에는 온갖 풀들이 논두렁 밭두렁을 휘덮고 있다.내가 아침마다 걷는 강둑길도 들길도 온통 풀들의 세상이다.

가을이 익어가면서 풀베기 손길이 분주해진다예초기를 멘 사람들이 산과 들을 분주히 오간다산에는 선영을 찾아 벌초하는 일로 바쁘고,들판에는 두렁 풀 깎는 일로 부산하다베어진 풀들이 산야에 널브러진다.

벌초를 제때 하지 않으면 자손이 무심해 보이고두렁풀을 자주 베지 않으면 농군이 나태해 보인다그래서인지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열심히들 풀을 벤다자손의 도리로농군의 본업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다.

베어져 나가는 것들을 가만히 보면 풀이 아니라 모두가 꽃들이다개망초달개비꽃한련초여뀌방동사니이질풀유홍초기름나물깨풀산층층이쑥부쟁이구절초벌개미취방아풀익모초어느 것 하나 풀꽃이 아닌 게 없다.

옛 사람들도 싫다고 베어 버리면 풀 아닌 게 없고좋다고 취하려 들면 모두가 꽃이라.(惡將除去無非草 好取看來總是花)”라고 했다벌초꾼과 농군들의 눈에는 모두가 성가신 잡초로만 보일 뿐인 풀들이다.

물론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그 꽃들이 아깝다하여 조상의 유택을 묵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며귀한 논들 밭들을 묵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풀들을 베어내는 그들의 손길로 조상은 빛이 나고들판은 기름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베어내도 풀은 다시 땅을 채운다흙이 숨 쉬는 곳이면 어디에나 솟고 자란다마당에도 돋고 뒤뜰에도 돋고흙 속에도 나고 돌 틈에도 나고물가에도 살고 물속에서도 살고길섶에도 자라고 길 가운데서도 자란다.

그것들은 누가 씨 뿌리지 않아도 나고가꾸지 않아도 잘 산다누가 바라지 않아도 꽃 피우고 거두지 않아도 열매 맺는다애써 퍼뜨리지 않아도 제 살 곳을 잘도 찾아 산다그야말로 무위자연이다.

사람들은 이런 풀들을 고이 두려 하지 않는다손길이 닿기만 하면 어디에 있는 풀이라도 뽑고 베기를 마다하지 않는다풀이란 오직 세상에 나오지 말아야 할 것세상에 나온 것은 없이해야 할 것이라 여긴다.

풀들이 자리 편하게 살 땅이 있다면 쪼아서 차라리 남새라도 가꾸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풀들은 쓸모없는 잡초에 지나지 않을 뿐그것이 피운 꽃들은 꽃으로 여기지 않는다무엇은 잡초이고무엇은 화초인가.

이를 두고 어느 시인은 대체 어느 누가잡초와 화초의 한계를 지어 놓았는가 하는 것이에요또 어떤 잡초는 몹시 예쁘기도 한데왜 잡초이기에 뽑혀 나가야 하는지요?”(마광수, ‘잡초’)라고 하소연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잡초와 화초를 나눈다그리고 잡초는 풀이고 화초는 꽃이라고 헤아린다다른 것들을 위해 풀은 사정없이 뽑거나 베어버린다그러나 풀은 뽑혀나가도 베어져 넘어져도 다시 나고 또 돋는다결코 스러지지 않는다.

풀꽃들이 만발한 강둑 풀숲 길을 걷는다강둑길은 묘지가 아니고 두렁이 아니어서 좋다풀이 베어져 나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베어진 풀꽃을 안타까워 할 일도 없다그 풀꽃들 속을 걷는 걸음이 아늑하고 경쾌하다.

그런데 강둑이 회반죽에 덮이고 있다저 정자 너머의 둑길은 벌써 덮였다정자 이쪽은 또 언제 덮일까다니는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서란다강둑 마을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서란다누구를 위한 편리이고무엇을 위한 복지일까.

풀베기의 가을을 다시 본다저 요란한 예초기 소리의 끝에는 어떤 세상이 베어져 나올까어떤 세상이 돋아날까저 풀이 모두 베어지고회반죽에 다 덮인 곳은 어떤 세상일까어떻게 살아야 하는 세상일까.(2017.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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