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둑 풀숲 길을 걷는다. 날마다 아침이면 걷는 나의 산책길이다. 숲에 우거진 풀들은 잎을 피워낼 뿐 아니라 저마다의 모양과 빛깔을 가진 꽃들을 빚어낸다. 꽃이 없는 풀이 없고, 풀이 없는 꽃이 없다. 모든 풀이 곧 모든 꽃이다. 요즈음은 메꽃이며 미국나팔꽃과 함께 유홍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다. 조그만 나팔꽃처럼 생긴 꽃잎의 선연한 다홍빛이 눈이 아릴 듯 고와 저를 향하고 있는 내 얼굴도 발갛게 물들 것 같다.
며느리밑씻개, 줄기에는 사나운 가시가 수없이 돋아나 있고, 고약한 이름에 아름답지 못한 전설도 간직하고 있는 꽃이지만 별사탕같이 생긴 옅은 분홍색 꽃이 앙증맞게 피어 슬며시 미소를 머금게 한다. 물봉선이며 고마리도 한껏 정취를 돋운다.![](http://lib7269.cafe24.com/images/chungwoohun3/wildflowers02.jpg) 이런 꽃들을 보면서 길을 걷노라면 마치 꿈길 속을 사분사분 걷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별 밭을 유영하는 듯도 하여 몸도 마음도 날듯이 경쾌해진다.이런 풀꽃들을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 편하게 두고 볼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맙고도 삽상한 일일까. 여름내 자란 풀이 산야에 무성하다. 산에는 언제나 청초해야 할 무덤에 풀들이 자욱하고, 들에는 온갖 풀들이 논두렁 밭두렁을 휘덮고 있다.내가 아침마다 걷는 강둑길도 들길도 온통 풀들의 세상이다. 가을이 익어가면서 풀베기 손길이 분주해진다. 예초기를 멘 사람들이 산과 들을 분주히 오간다. 산에는 선영을 찾아 벌초하는 일로 바쁘고,들판에는 두렁 풀 깎는 일로 부산하다. 베어진 풀들이 산야에 널브러진다. 벌초를 제때 하지 않으면 자손이 무심해 보이고, 두렁풀을 자주 베지 않으면 농군이 나태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열심히들 풀을 벤다. 자손의 도리로, 농군의 본업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다.![](http://lib7269.cafe24.com/images/chungwoohun3/wildflowers04.jpg) 베어져 나가는 것들을 가만히 보면 풀이 아니라 모두가 꽃들이다. 개망초, 달개비꽃, 한련초, 여뀌, 방동사니, 이질풀, 유홍초, 기름나물, 깨풀, 산층층이, 쑥부쟁이, 구절초, 벌개미취, 방아풀, 익모초…. 어느 것 하나 풀꽃이 아닌 게 없다. 옛 사람들도 “싫다고 베어 버리면 풀 아닌 게 없고, 좋다고 취하려 들면 모두가 꽃이라.(惡將除去無非草 好取看來總是花)”라고 했다. 벌초꾼과 농군들의 눈에는 모두가 성가신 잡초로만 보일 뿐인 풀들이다. 물론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그 꽃들이 아깝다하여 조상의 유택을 묵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며, 귀한 논들 밭들을 묵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풀들을 베어내는 그들의 손길로 조상은 빛이 나고, 들판은 기름지게 될 것이다.![](http://lib7269.cafe24.com/images/chungwoohun3/wildflowers05.jpg) 그렇게 베어내도 풀은 다시 땅을 채운다. 흙이 숨 쉬는 곳이면 어디에나 솟고 자란다. 마당에도 돋고 뒤뜰에도 돋고, 흙 속에도 나고 돌 틈에도 나고, 물가에도 살고 물속에서도 살고, 길섶에도 자라고 길 가운데서도 자란다. 그것들은 누가 씨 뿌리지 않아도 나고, 가꾸지 않아도 잘 산다. 누가 바라지 않아도 꽃 피우고 거두지 않아도 열매 맺는다. 애써 퍼뜨리지 않아도 제 살 곳을 잘도 찾아 산다. 그야말로 무위자연이다. 사람들은 이런 풀들을 고이 두려 하지 않는다. 손길이 닿기만 하면 어디에 있는 풀이라도 뽑고 베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풀이란 오직 세상에 나오지 말아야 할 것, 세상에 나온 것은 없이해야 할 것이라 여긴다. 풀들이 자리 편하게 살 땅이 있다면 쪼아서 차라리 남새라도 가꾸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풀들은 쓸모없는 잡초에 지나지 않을 뿐, 그것이 피운 꽃들은 꽃으로 여기지 않는다. 무엇은 잡초이고, 무엇은 화초인가.
이를 두고 어느 시인은 “대체 어느 누가/ 잡초와 화초의 한계를 지어 놓았는가 하는 것이에요/ 또 어떤 잡초는 몹시 예쁘기도 한데/ 왜 잡초이기에 뽑혀 나가야 하는지요?”(마광수, ‘잡초’)라고 하소연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잡초와 화초를 나눈다. 그리고 잡초는 풀이고 화초는 꽃이라고 헤아린다. 다른 것들을 위해 풀은 사정없이 뽑거나 베어버린다. 그러나 풀은 뽑혀나가도 베어져 넘어져도 다시 나고 또 돋는다.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C4523359CF0F1803)
풀꽃들이 만발한 강둑 풀숲 길을 걷는다. 강둑길은 묘지가 아니고 두렁이 아니어서 좋다. 풀이 베어져 나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 베어진 풀꽃을 안타까워 할 일도 없다. 그 풀꽃들 속을 걷는 걸음이 아늑하고 경쾌하다.
아, 그런데 강둑이 회반죽에 덮이고 있다. 저 정자 너머의 둑길은 벌써 덮였다. 정자 이쪽은 또 언제 덮일까. 다니는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서란다. 강둑 마을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서란다. 누구를 위한 편리이고, 무엇을 위한 복지일까. 풀베기의 가을을 다시 본다. 저 요란한 예초기 소리의 끝에는 어떤 세상이 베어져 나올까. 어떤 세상이 돋아날까. 저 풀이 모두 베어지고, 회반죽에 다 덮인 곳은 어떤 세상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세상일까.♣(2017.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