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사무소 복지계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아이들과의 어울림 학교’ 행사에도 한 동네를 맡아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주십사고 했다. 난감한 부탁이었다. 지역의 조손 세대가 함께 어울려 조부모 세대가 손자 세대에게 지역 사람들이 살아온 내력이며 모습들을 이야기해주고, 아이들은 지난날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며 미래의 삶을 더욱 보람되게 가꾸기를 돕고자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9978233359F85B5B1C)
면사무소와 지역사회 단체의 주선으로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한 번씩 우리 마을을 찾아왔었다.그 때마다 아이들에게 마을 유래며 삶의 모습을 들려주라며 나에게 청했다. 마을을 산 지 그리 오래지 않아 아는 게 별로 없었지만 간곡한 권을 못 이겨 내가 아는 대로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었다고 청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우리 마을도 아닌 다른 동네 하나를 맡아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 달라 했다. 다른 동네는 더욱 아는 게 없어서 못하겠다고 했지만, ‘좀 연구하시면 될 게 아니냐.’며, 아이들이 내가 해주는 이야기가 제일 낫다고 하더라는 칭사와 함께 무가내로 청해왔다.![](http://lib7269.cafe24.com/images/chungwoohun3/oulim11.jpg) 이웃 동네를 한 번 공부해 보겠다며 하릴없이 응낙하고 말았다. 얼결에 ‘이웃 동네’라 했지만,자료들을 조금 찾아보니 내가 생각한 그 동네는 일제강점기를 맞을 무렵부터 농민조합 운동에 눈을 떠서 함께 힘 모아 농사짓고자하는 조합을 만들었고, 또 그 동네에는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운 분도 있어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는 있을 것 같았다. 부탁을 받고부터 바로 자료 섭렵을 위해 애쓰면서 동네를 잘 아는 분을 찾아 역사와 지리 등을 물어 익혔다. 그런 분더러 아이들한테 바로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사 하고 부탁을 했지만, 아이들 앞에 서는 일에는 모두 난색을 보였다. 드디어 아이들과 만나는 날이 왔다. 찾아 온 아이들은 다행히 몇 달 전에 우리 마을을 찾아왔던 그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재미도 느낄 수 있고 유익하기도 해야 할 텐데,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먼저 이 마을이 행정 명칭은 ‘오천리’로 불리고, 고유한 이름은 ‘저부실’이라고 하는 유래와 함께 마을의 역사를 들려주기로 했다. 다음은 일찍이 다른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농민조합 운동과 더불어 이 마을 출신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우리의 현대사와 함께 엮어 보기로 했다. 그 독립운동가는 다름 아닌 근래 영화로도 유명해진 박열(朴烈) 의사였다.![](http://lib7269.cafe24.com/images/chungwoohun3/oulim14.jpg) 아이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먼저 마을공원에 있는 마을 유래 비며 조합운동 기념비와 그 운동을 처음 시작한 분의 송덕비를 둘러보았다. 빗돌의 내용에 대해서는 내가 이야기해주겠다 하고 마을회관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회관 회의실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부터 이 지역에는 큰 마을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은 오동나무가 많은 오리골[梧洞]이고, 한 마을은 지금 여기 샘골[泉洞]이지요.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두 마을을 합쳐 오천리(梧泉里)라 부르게 되었어요….”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 초쯤 저 위 산 아래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큰 산불을 만나 모든 걸 다 태우고 이 아랫마을로 내려와 살면서, 살던 곳을 가리켜 ‘저 불난 마을’이라고 했대요. 그런데 그 때는 우리 글자가 없어서 이두 표기로 ‘기화곡(其火谷)’라 적었는데, 이걸 다시 옮기면 그(저) 기, 불 화,마을(실) 곡, ‘저부실’이 되는 거예요.…” 아이들이 신기하다는 듯, 눈길을 모았다. 어떤 아이는 폰을 들어 내 말을 담고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역사가 보이는 고려 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마을 역사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일제(日帝)가 우리나라를 서서히 침략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라는 걸 강제로 맺어 외교권을 빼앗더니 1906년에는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나라를 다스리려 하는 거예요. 큰일 났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뭉치기 시작했지요. 바로 이 마을에도 그런 자각이 일어나 강신묵, 남만유 두 분이 우리끼리 뭉쳐 잘 살도록 해야겠다며 ‘성산조합’이라는 걸 만들어 조합운동을 시작했지요. 그 때 박열 의사는 5살이었어요.…” 아이들의 눈동자가 더욱 반짝이는 것 같았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오늘이 바로 10월26일,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날이라고 하자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일제가 우리 강토를 수탈하기 위해 토지조사를 해대는 걸 보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났어요. 당시 경성고보 3학년에 다니고 있던 박열 의사도 만세 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일경에게 쫓기게 되었는데, 추적을 피해 고향을 찾아와 잠시 머물다가 큰 뜻을 품고 일본으로 갔대요. 마을에서는 더욱 열심히 일하자며 ‘성산조합’을 근농조합(勤農組合)으로 바꾸어 더 굳세게 뭉쳤어요.…” 아이들은 폰을 더욱 높이 들었다. 인솔 선생님도 눈동자에 빛을 더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박열 의사는 일본에서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여 천황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검거되어 그 때부터 23년간 치열한 옥중 투쟁을 벌이게 된다는 이야기를 해나갔다.
1924년에는 지역 유지들이 기금을 모아 공립보통학교 유치운동을 벌여 드디어 1926년에 우리 지역에 처음으로 초등학교가 생기게 되고, 그 때 박열 의사는 동경 대심원에서 “나 박열은 조선 민중을 대표하여 법정에 서노라”며 일제와 맹렬히 싸워나가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비로소 석방이 되면서 일본에서 재일조선거류민단장이 되어 동포의 복지를 위해 애쓰고 있던 중에 1949년에 귀국하여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안타깝게 납북되었다는 이야기에 이르렀다. 해방 후 근농조합은 전 주민이 조합원이 되어 더욱 활발한 운동으로 여러 가지 복리사업을 벌이다가1975년 새마을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공공 협동조합이 활성화 되면서 조합의 기능을 그리 넘기고 주민 자치단체인 ‘권농회’, ‘주민회’로 탈바꿈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과정을 들려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아이들에게 살고 있는 이 땅, 이 마을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해와 사랑을 심어주었을까. 짧은 시간에 재미나게 들려주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 어린 것들이 무엇을 알겠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모습들이 대견스럽고도 기뻤다. 몇 날 며칠을 두고 책과 사람을 찾아다니며 마을을 익혔던 일들이 조금은 보람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 즐겁기도 했다.![](http://lib7269.cafe24.com/images/chungwoohun3/oulim17.jpg)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샘골’이라는 지명 유래가 된 마을의 영천(靈泉)인 샘을 답사하는 것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끝내었다. 오늘 이 학습으로 아이들이 우리 함께 사는 곳에 대한 조그만 긍지라도 얻을 수 있었기를 바라고 싶지만, 아이들보다 내가 얻은 것이 더 큰 것 같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 무엇보다도 즐거운 ‘공동 학습’이었다. 아이들은 타고 온 통학차를 타고 떠나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 사는 곳을 나도 더욱 알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 잘 가거라. 내 이야기에 모자라는 게 있거들랑 너희들이 더 공부해라. 나도 더욱 공부할게….”♣(2017.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