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의 길 지키기

이청산 2017. 7. 6. 12:18

나의 길 지키기

 

낫과 톱을 들고 아침 산책길을 나섰다아내 몰래 들고 나서는 길이다.아내는 쉽게 삭힐 수 없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늘 걷는 길 따라 고샅을 나서 논두렁길을 지나 마을 숲으로 간다숲에는 내가 돌보고 있는 상사화 꽃밭이 있다누가 나에게 그리하란 이도 없지만혹 사람들의 발길 손길에 해라도 입을까봐 금줄을 쳐서 갈무리하고 있다.

지금 상사화는 무성하던 잎이 다 말라 땅으로 잦아들고 있다마른 잎이 흙이 되어 가면 대궁이 솟고 꽃이 피어난다땅에 붙어있는 마른 잎 주위로 갖은 풀이 무성하다저것들을 쳐주어야 마를 잎이 제대로 말라 대궁이 생기롭게 솟을 것 같다.

주위의 풀들을 낫으로 베어주었다한참을 베고 나니 몸에 땀이 밴다.하얗게 말라 땅속으로 들듯이 엎드려 있는 잎들이 한결 편안해 보인다.여름이 한고비를 넘어설 무렵이면 기다란 꽃술을 내밀며 홍자색 은은한 꽃을 피울 것이다.

서로 그리며 피고 지는 상사화의 잎과 꽃을 지켜보는 것이 내 산책길의 빼놓을 수 없는 사랑이요 보람이다상사화를 지키기 위해 땀 흘리는 내 모습을 아내가 보면 텃밭의 풀들이나 열심히 뽑으라며 핀잔을 주기 십상일 것이다.

상사화를 싸안고 있는 노거수 우거진 숲을 지나 강둑을 오른다새파란 갈대숲 사이로 윤슬 반짝이며 흐르는 강물도 가슴을 고즈넉이 씻어주지만길섶에 피어있는 온갖 풀꽃들이 사랑하는 이의 손길처럼 마음을 아늑히 어루만져 준다.

그 길섶에 어여쁜 풀꽃들을 배배 감으며 못살게 구는 것이 있다칡넝쿨이다저들끼리만 무성히 피어나면 누가 뭐라나다른 꽃대를 감아 오르고 있는 넝쿨을 사정 보지 않고 잘라버린다뻗는 방향을 돌려 남 괴롭히지 말고 살라며 일러도 준다.

칡넝쿨이 타고 오르는 것은 풀이며 나무를 가리지 않는다강둑에 늘어선 벚나무에도 치근거리며 마구 기어오른다봄이면 강둑을 꽃길 천지로 만드는 나무이거늘저것들이 저리 온몸을 감아버리면 숨인들 제대로 쉴 수 있을까.

어떤 생명체인들 귀하지 않은 게 있으랴만다른 것의 삶을 옥죄는 비행은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나무를 타고 오르는 줄기를 모두 잘라버린다내일 아침이면 이것들은 풀기를 잃고 모두들 축 늘어질 것이다.

벚나무들이 집중하는 것은 오직 가지를 뻗치고 꽃을 틔우는 일인 것 같다제 몸 어디가 갈라 터지고 어디가 비틀어져도 상관하지 않는다주위에 뻗어나고 있는 나무들제 몸에서 터져 나온 잔가지를 톱으로 과감히 베어내면서 내년 봄에 더욱 흐드러지게 필 꽃들을 그린다.

한참을 베고 다듬고 나니 온몸이 다 젖었다젖은 몸이 미소를 짓게 한다그럴 힘으로 텃밭이나 열심히 가꾸라며 힐난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하지만내가 즐겨 다니는 길을 내가 가꾸지 않으면 누가 다듬어 나를 즐겁게 할까.

그리움으로 설레는 상사화 아리따운 자태이며붉고 노란 색깔로 피어나는 풀꽃들이 곧장 나에게 안겨올 것 같다그렇게 나의 아침을 아늑하게 해주는 정경을 머릿속에 담고 그리며 이마의 땀을 긋는다.

그런데 어쩌랴내가 걷고 싶은 길이 왜 내가 그리는 모습으로만 있어주지 않는가어느 날 이 강둑에 둔중한 기계들이 들어와서 분잡히 움직이더니 둑길 한 자락의 풀들을 밀고 회반죽으로 덮어버렸다주민의 숙원을 이루어주는 것이란다.

겨우 명줄이나 지키듯 가까스로 붙어있는 회반죽 길섶에도 애기똥풀이며 고들빼기지칭개 꽃들이 피어났다.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던 어느 날 보니그 길섶에 누가 그랬는지 풀꽃들을 말갛게 걷어내고는 들깨 모종을 줄지어 심어 놓았다웃어야 할까울어야 할까.

한 뼘 땅이라도 더 쪼아 소출을 얻고 싶어 하는 농심이야 어찌 탓할 수가 있으랴만풀꽃을 그리는 마음 한 곳에 생채기가 지는 것 같아삭연해지는 심사를 어찌할 수가 없다.

어디 그 농심만이 그런가평생을 함께 하고 있는 아내도 마찬가지다.마당 없는 집의 삶을 정리하고 한촌을 찾아와 맨 흙이 드러나 있는 마당을 품고 살게 되었지만아내는 그 마당에 피는 꽃들을 제치고 상추를 심고 부추를 가꾸려 한다.

그런 아내의 눈에 마을 숲의 상사화를 가꾸고 강둑의 풀꽃을 보듬는 내 모습이 얼마나 부질없어 보일까그러나 아내여삶의 길을 함께 가고 있다 한들 나의 길과 당신의 길이 언제나 같기만 할까늘 한 길만을 손잡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언제나 새맑은 얼굴로 나를 반겨주는 풀꽃의 그 길을 나는 결코 버릴 수 없다강둑 한 자락이 회반죽으로 덮여 있을지라도풀꽃 길 한 자리에 들깨가 들어앉을지라도나는 강둑 풀꽃 보듬기를 멈추지 않겠다벚꽃 화사한 봄 강둑길 그리기를 결코 마다지 않겠다.

아내가 즐겨 가꾸는 남새밭이 이네의 길이라면 강둑 풀꽃 길은 나의 길이다나는 다시 낫이며 톱을 들고 산책길을 나설 것이다어이없어 할 아내의 눈길이 등에 와 닿으면 걸망에 진 채로 풀꽃을 가꾸고 벚나무를 다듬으러 갈 것이다나의 길을 가꾸고 지켜 나갈 것이다.

아내의 밭인들 어찌 모른 체할 수 있으랴더불어 싱싱하게 가꾸어야 할 삶의 자리임을 왜 모를까봄이면 갈고 심고 가을이면 캐고 베어 함께 걸우고 거두어야 할 땅이 아닌가철 따라 삽 메고 괭이 들고 가벼이 나설 일이다.

어여쁜 풀꽃들과 함께 가꾸어가야 할 나의 길을 위하여-.♣ (201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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