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해거름 산을 오른다. 날마다 그리움 속에서 기다리는 그 무렵이요, 걸음이다. 해거름 겨울 산을 오르노라니 모두가 해거름이다. 때도 해거름이고, 철도 해거름이고, 내 삶도 해거름을 걷고 있다. 해거름이 정겹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해야 할 아침의 조바심도 없고. 또 무언가를 왕성히 이루어내야 할 대낮의 거친 숨소리도 없고, 모든 걸 다 떨치고 고요에 젖어가고 있는 해거름이 편안하다.
해거름 산이 아늑하다. 볕 바라기로 목을 길게 빼고 광합성을 위해 골몰하던 푸나무들이 숨결을 고르며 사색에 잠겨가고, 나뭇가지 사이로 비껴드는 고운 빛살을 받으며 길짐승 날새들이 잘자리를 찾아들고 있는 해거름 산이 고즈넉하다. 치렁대던 것을 다 벗어버린 겨울 산이 정밀(靜謐)하다. 움이며 싹이며 부지런히 틔우고 피워냈던 시절을 지나, 크고 작은 잎이며 꽃으로 천지를 휘덮던 철도 보내고, 떨켜 뒤에서 색색으로 물들던 잎새들도 미련 없이 떨군 산은 이제 말간 가슴으로 앉았다.![](http://lib7269.cafe24.com/images/chungwoohun3/haegurum04.jpg) 저 가슴 속에 안긴 발간 몸들을 보라. 얼마나 단출하고도 홀가분한 모습인가. 기쁨과 슬픔이며,사랑과 미움이며 세상이 지닌 모든 정념들을 다 떨쳐내고 거저 마른 몸 하나로 서 있는 저 나무를 보라. 마치 간결체 문장 같다. 수식어를 다 떨쳐버리고 오직 골수만 간직하고 있는 간결체다. 간결체 문장은 머금고 있는 뜻마저도 간결할까. 아니다. 그 말수 없는 말속에 수많은 사연이며 비기를 껴안고 있을 수도 있다. 저 나목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무슨 사연들을 그리고 있을까.찬바람 불고 비가 내리던 어느 이른 봄날, 싹을 틔워야겠다며 애간장을 태웠던 기억을 돌아보고 있을까. 그 싹 위로 꽃눈 뾰족이 내밀 때의 희열감을 돌이키고 있을까. 그래, 그 때 활짝 피웠었지.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볕 따스하던 어느 날 아침 몸이 온통 꽃으로 휘덮였지. 꽃잎들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지. 한 때, 그런 때가 있었어. 참 황홀한 순간이었어.
그 꽃 이파리들, 미련 없이 보냈지. 또 할 일이 있잖아. 잎도 피워야 하고 열매도 맺어야했잖아. 때로는 몰아쳐 온 폭풍우가 몇 가지를 꺾어버리기도 했지만, 솟음 치는 생명 욕구마저 꺾일 수는 없었지. 그 질기고도 은밀한 숨결을 어쩌겠어? 제 아무리 사나운들 내 속의 뜨거운 사랑을 어찌 짓이겨버릴 수 있겠어? 마침내 푸른 잎을 무성히 피워냈고, 열매들도 영글게 했지. 그렇게 못했다면 지금 이렇게 서 있을 수 있을까. 이제 그 잎들도 열매들도 다 보내고 다시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지만,세월은 돌고 도는 거잖아. 이 찬바람이 가고나면 지난날의 그 꽃이며 잎과 열매를 다시 피워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세월이 돌 듯 목숨도 또 돌고 돌겠지.![](http://lib7269.cafe24.com/images/chungwoohun3/haegurum03.jpg) 지나온 삶의 이력을 어찌 다 풀어낼 수 있을 건가. 간난과 신산으로 끓었던 애틋하고 아린 기억들이야 지금 불러내어 본들 어찌할 건가. 그것들이 있었기에 꽃도 잎도 피워낼 수 있었겠지. 열매가 여물 수도 있었겠지. 자박이는 낙엽을 밟으며 산을 오른다. 서걱서걱 밟히는 마른 잎들의 소리가 마치 두런두런 지난날을 회억하는 나무들의 말소리 같다. 아니다. 저들은 아무 소리도 없다. 적요 속 깊숙이 숱한 사연을 묻고 있을 뿐이다. 그 내밀한 숨결 속에 묻어온 내력을 세상의 말로 어찌 다 드러낼 수 있을까. 겨울 산의 나무는 오직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서 있을 뿐이다.지나온 삶을, 맞이할 삶을, 그 삶을 담고 있는 세상을 관조로 새기며 서있을 뿐이다. 해가 다홍빛 노을을 풀어낸다. 맑은 햇살을 뿌리는 하늘 푸른빛도 시리도록 곱지만, 저 노을빛도 설레게 곱지 않은가. 노을 고운 빛이 빈 나뭇가지로 스며든다. 고운 빛에 감긴 가지들이 미소를 짓고 있다. 지나온 모든 삶을 미소로 그러안고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34B1150587DA69D20)
겨울 산을 오르면 말이 잠긴다. 울고 웃던 지난 생애의 모든 사연들도 조용히 가라앉는다. 해거름 산을 오르면 더욱 깊이 묻힌다. 빈 가지 사이의 노을빛이 따사로울 뿐이다. 그 불립문자 앞에서 겸허해질 뿐이다. 해거름 빛이 여물어간다. 하루의 모든 일들을 다 떨치고, 살아온 모든 사연들을 다 내려놓고 빈 몸으로 서있는 나무에 젖어드는 해거름이 홋홋하다. 해거름 겨울 산 빈 나무를 보며 내 해거름 빈 몸을 목다심해 본다. 저 나무는 또 무슨 상념에 젖을까.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또 어디로 가야 할까. 해가 건넛산 마루를 넘어가고 있다.♣(201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