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해거름 겨울 산을 오르며

이청산 2017. 1. 17. 14:08

해거름 겨울 산을 오르며

 

오늘도 해거름 산을 오른다날마다 그리움 속에서 기다리는 그 무렵이요걸음이다해거름 겨울 산을 오르노라니 모두가 해거름이다때도 해거름이고철도 해거름이고내 삶도 해거름을 걷고 있다.

해거름이 정겹다무언가를 새로 시작해야 할 아침의 조바심도 없고또 무언가를 왕성히 이루어내야 할 대낮의 거친 숨소리도 없고모든 걸 다 떨치고 고요에 젖어가고 있는 해거름이 편안하다.

해거름 산이 아늑하다볕 바라기로 목을 길게 빼고 광합성을 위해 골몰하던 푸나무들이 숨결을 고르며 사색에 잠겨가고나뭇가지 사이로 비껴드는 고운 빛살을 받으며 길짐승 날새들이 잘자리를 찾아들고 있는 해거름 산이 고즈넉하다.

치렁대던 것을 다 벗어버린 겨울 산이 정밀(靜謐)하다움이며 싹이며 부지런히 틔우고 피워냈던 시절을 지나크고 작은 잎이며 꽃으로 천지를 휘덮던 철도 보내고떨켜 뒤에서 색색으로 물들던 잎새들도 미련 없이 떨군 산은 이제 말간 가슴으로 앉았다.

저 가슴 속에 안긴 발간 몸들을 보라얼마나 단출하고도 홀가분한 모습인가기쁨과 슬픔이며,사랑과 미움이며 세상이 지닌 모든 정념들을 다 떨쳐내고 거저 마른 몸 하나로 서 있는 저 나무를 보라.

마치 간결체 문장 같다수식어를 다 떨쳐버리고 오직 골수만 간직하고 있는 간결체다간결체 문장은 머금고 있는 뜻마저도 간결할까아니다그 말수 없는 말속에 수많은 사연이며 비기를 껴안고 있을 수도 있다.

저 나목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무슨 사연들을 그리고 있을까.찬바람 불고 비가 내리던 어느 이른 봄날싹을 틔워야겠다며 애간장을 태웠던 기억을 돌아보고 있을까그 싹 위로 꽃눈 뾰족이 내밀 때의 희열감을 돌이키고 있을까.

그래그 때 활짝 피웠었지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볕 따스하던 어느 날 아침 몸이 온통 꽃으로 휘덮였지꽃잎들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지한 때그런 때가 있었어참 황홀한 순간이었어.

그 꽃 이파리들미련 없이 보냈지또 할 일이 있잖아잎도 피워야 하고 열매도 맺어야했잖아때로는 몰아쳐 온 폭풍우가 몇 가지를 꺾어버리기도 했지만솟음 치는 생명 욕구마저 꺾일 수는 없었지.

그 질기고도 은밀한 숨결을 어쩌겠어제 아무리 사나운들 내 속의 뜨거운 사랑을 어찌 짓이겨버릴 수 있겠어마침내 푸른 잎을 무성히 피워냈고열매들도 영글게 했지그렇게 못했다면 지금 이렇게 서 있을 수 있을까.

이제 그 잎들도 열매들도 다 보내고 다시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지만,세월은 돌고 도는 거잖아이 찬바람이 가고나면 지난날의 그 꽃이며 잎과 열매를 다시 피워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세월이 돌 듯 목숨도 또 돌고 돌겠지.

지나온 삶의 이력을 어찌 다 풀어낼 수 있을 건가간난과 신산으로 끓었던 애틋하고 아린 기억들이야 지금 불러내어 본들 어찌할 건가그것들이 있었기에 꽃도 잎도 피워낼 수 있었겠지열매가 여물 수도 있었겠지.

자박이는 낙엽을 밟으며 산을 오른다서걱서걱 밟히는 마른 잎들의 소리가 마치 두런두런 지난날을 회억하는 나무들의 말소리 같다아니다저들은 아무 소리도 없다적요 속 깊숙이 숱한 사연을 묻고 있을 뿐이다.

그 내밀한 숨결 속에 묻어온 내력을 세상의 말로 어찌 다 드러낼 수 있을까겨울 산의 나무는 오직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서 있을 뿐이다.지나온 삶을맞이할 삶을그 삶을 담고 있는 세상을 관조로 새기며 서있을 뿐이다.

해가 다홍빛 노을을 풀어낸다맑은 햇살을 뿌리는 하늘 푸른빛도 시리도록 곱지만저 노을빛도 설레게 곱지 않은가노을 고운 빛이 빈 나뭇가지로 스며든다고운 빛에 감긴 가지들이 미소를 짓고 있다지나온 모든 삶을 미소로 그러안고 있다.

겨울 산을 오르면 말이 잠긴다울고 웃던 지난 생애의 모든 사연들도 조용히 가라앉는다해거름 산을 오르면 더욱 깊이 묻힌다빈 가지 사이의 노을빛이 따사로울 뿐이다그 불립문자 앞에서 겸허해질 뿐이다.

해거름 빛이 여물어간다하루의 모든 일들을 다 떨치고살아온 모든 사연들을 다 내려놓고 빈 몸으로 서있는 나무에 젖어드는 해거름이 홋홋하다.

해거름 겨울 산 빈 나무를 보며 내 해거름 빈 몸을 목다심해 본다저 나무는 또 무슨 상념에 젖을까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또 어디로 가야 할까.

해가 건넛산 마루를 넘어가고 있다.(20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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