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길 꽃과 더불어

이청산 2016. 9. 11. 21:07

 

길 꽃과 더불어

 

 

요즈음은 아침 산책 시간이 부쩍 늘었다. 뿐만 아니라 해거름이면 뒷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시간도 많이 늘어났다. 지금부터 수 년 전 한촌 생활을 처음 시작할 무렵에는 아침 산책길은 3,40분이면 족하던 것이 지금은 한 시간 넘게 걸리고, 한 시간 남짓 걸리던 산행길이 두 시간을 넘어봄꽃 만발한 산행길가곤 한다.

아침 산책이든 저녁 산행이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챙기기 위한 운동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한 생애를 마감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건강을 건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기왕에 물 맑고 산 좋은 자연을 찾아왔으니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자연의 운동을 하리라 하고 찾은 방법이 산책이고 산행이었다. 처음엔 부지런히 걷고, 가쁘게 산을 오르며 땀을 흠뻑 흘리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달을 지나고 해가 흐르는 사이에 걷는 길섶이며 오르는 비탈길을 수놓고 있는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뜨여왔다.큰개불알꽃

풀은 풀만이 아니고 나무는 나무만으로 피고 자라는 것이 아니었다. 풀이든 나무든 꽃이 없고서야 잎도 가지도 생겨날 수 없고 자라날 수도 없는 게 눈에 보였다. 무슨 빛깔 어떤 모양이든 꽃을 다 가지고 있으니. 보는 것 모두가 풀꽃(‘꽃풀이란 말이 왜 없을까?) 아닌 풀이 없고, 꽃나무 아닌 나무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한촌의 길과 산을 걷기 시작하며 제일 먼저 본 꽃은 들길에는 큰개불알꽃이었고, 산길에는 올괴불나무꽃이었다. 두 꽃 모두 이른 봄꽃이서 그런지 자세히 보아야만 보일 듯한 아주 작은 꽃이었다.

올괴불나무꽃점잖은 이름으로 봄까치꽃이라고도 하는 큰개불알꽃은 초록의 올망졸망한 잎 속에 파란 꽃을 조그맣게 피워 그 작은 모습으로 소리치듯 대지의 봄을 알려주고, 올괴불나무는 가느다란 줄기에 먼 하늘 반짝이는 별 같은 볼그레한 꽃을 달고 산속의 봄을 깨워주고 있었다.

평생을 쫓기듯 살아오다보니 언제 한번 푸나무를 눈여겨 볼 겨를이 없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 탓이다. 이제 모든 것을 다 떨치고 이 한촌을 찾아와 살면서, 그 삶의 날이 쌓여가는 사이에 풀과 나무들이 점점 예사스럽지 않게 새겨져 왔다.

잡초로만 보이던 것에 꽃이 피어나는 걸 보며 풀꽃들에 끌리는 마음이 조금씩 더해져 갔다. 그럴수록 뭐라 부르는지 그 이름이 궁금했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 꽃이된다는 어느 시 구절처럼 이름을 알아 나의 꽃으로 만들고 싶었다. 꽃천사 식물천사 '모야모' 앱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올려 묻곤 했다. 요즈음은 스마트폰에 꽃을 담아 보내기만 하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즉시로 이름을 알려주는 앱이 생겨나 이름을 알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그러는 사이에 5백 종에 가까운 푸나무가 나에게로 와서 나의 꽃이 되었다. 모르고 있었을 뿐 근본 없는 푸나무가 없고, 이름 없는 꽃이 없었다.

봄에는 솜나물, 광대나물, 그늘사초, 구슬붕이, 봄맞이, 양지꽃, 꽃다지, 애기똥풀, 주름잎, 매화말발도리, 종지나물, 현호색, 제비꽃, 개망초, 여름에는 나리꽃, 까치수염, 금계국, 사위질빵, 물레나물, 수레국화, 짚신나물, 갈퀴나물, 뚝깔……. 어찌 이것뿐이랴

둥근잎유홍초그 이름들을 아무리 늘어놓은들 천지의 꽃들을 어찌 다 안다 하랴. 세상의 꽃들이란 어쩌면 바닷가의 몽돌보다도, 하늘의 별보다도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사는 곳의 흙을 따라 바람을 따라 종류도 모양도 다 다를 수 있을 것이니 그 수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걸을 때마다, 볼 때마다 늘 새 얼굴들을 드러내곤 한다.

오늘 아침도 주황색 둥근잎유홍초며 남색 달개비꽃이 만발한 풀숲 길을 지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사랑하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수까치깨길섶에 못 보던 새로운 꽃이 보였다. 이전엔들 왜 없었을까? 마음을 기울여 살피려 하니 꽃들도 반갑게 얼굴을 내밀어준 것인지도 모른다.

샛노란 꽃잎에 기다란 꽃술을 내민 꽃이 보인다. 얼른 폰 카메라에 담아 꽃 이름 전문 앱에 물었더니 벽오동과의 한해살이 풀인 수까치깨라며, 꽃말이 인내, 사모, 그리움이라는 것도 알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긴 꽃술은 무언가를 그리는 몸짓인 것 같다.

새팥어여쁜 꽃 친구를 또 하나 얻은 기쁨을 안고 발걸음을 옮겨나가는데, 노란 색종이로 접은 리본 같기도 한 조그만 꽃이 또 눈에 뜨였다. 다시 그 앱에 물었더니 새팥이라는 장미목 콩과의 한해살이풀로 꽃 지고나면 팥 알갱이 같은 씨앗이 열리는 야생 콩 종류라 했다. 얼기설기 우거진 풀들을 헤치고 곱고도 예쁜 꽃을 저리 함초롬히 피울 수가 있을까?

그렇게 꽃을 즐겨 보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과 함께 걷다 보니 오늘 아침 산책길도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그 시간이란 무엇이던가. 바로 아름다운 꽃이었다. 그 시간이 나에게 꽃을 주고 아름다움을 주었다.

어제도 오늘도 걷고, 내일도 걸을 나의 한촌 길은 모두가 꽃이고 모두가 아름다움이다. 이 한촌 길이 곧 내 삶의 길이 아닌가. 내 삶이 온통 꽃이다. 걸을수록 꽃은 더욱 풍성해지고 더욱 아름다워진다. 내 삶도 더욱 풍요로워지고 더욱 아름다워질 길밖에 없다.

나의 길에 잡초란 없다. 풋풋이 사는 야생초가 있을 뿐이고, 함초롬히 피는 야생화가 존재할 뿐이다. 야생초처럼, 야생화처럼 살고 싶다. 길 꽃과 더불어 걷고 사는 내 한촌의 삶-.(2016.9.7.)

 

※그림에 마우스를 올리면 꽃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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