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산이여 들이여 강이여 출렁이는 바다여

이청산 2016. 8. 24. 20:48

산이여 들이여 강이여 출렁이는 바다여
-네 번째 시낭송 콘서트를 마치고

 

……내 그리운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여 회원과 마주 보면서 마지막 구절을 함께 외며 수필 낭독을 끝내고 관객을 향해 인사할 때 객석에서는 맑은 탄성과 함께 갈채가 쏟아졌다.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올해의 시낭송 콘서트는 한 회원이 제안한 안을 바탕으로 하여 주제를 산이여 들이여 강이여 출렁이는 바다여로 정하고, 우리의 현대사에 얽힌 시대의 애환을 시로 새겨 보기로 했다. 제목은 낭송시 중의 하나인 그 눈부심 불기둥 되어’(허영자)의 한 구절을 따왔다. 의의를 한층 살리기 위해 광복절 무렵으로 콘서트 날짜를 잡기도 했다.

역사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퍼포먼스 형태로 진행하되, 너무 현실 참여적이거나 목적적이지는 않게 낭송예술의 순수성을 살려가며 시대적인 삶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보기로 했다. 봄이 익어가던 5월부터 틈틈이 모여 낭송 기량을 닦고 공연 내용을 다듬어 나갔다. 한 자리에 모여 함께 호흡을 가다듬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가운데 스물두 번을 함께 모였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기대도 컸지만 두려움도 적지 않았다. 홍보에 애쓰긴 했지만 우리의 뜻이 얼마나 알려져 관객이 얼마나 올 것이며,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까. 사회도 없이 스토리와 퍼포먼스 중심으로 엮어 나가는 무대가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을까.

오후 4시의 콘서트를 앞두고 아침부터 공연장에 모였다. 실제의 무대에서 리허설을 해보기는 처음이다. 모두들 나름대로 준비한 의상을 갖추어 입고 소주제를 따라 열심히 낭송을 하면서 행위를 엮어나갔다. 영상과 배경음악에 맞추며 무대를 이어내기가 쉽지 않다.

무대를 열 때가 가까워지면서 초청한 내빈들과 관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작할 무렵에는 객석 몇 곳 빈자리가 보이는가 싶더니 개회에 이어 프로그램이 시작될 무렵에는 객석이 다 차다 못해 뒤에 서있는 사람까지 보였다. 어깨가 불끈 솟는 것 같았다.

대금으로 연주하는 오프닝 사운드에 이어 회장님의 내빈 소개와 낭송예술의 사랑을 통해 우리의 삶에 윤기와 풍요를 더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인사말이 이어졌다. 내빈들은 대부분 문화 예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로 낭송 전문가들도 많이 있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회장님은 낭송 전문 지도자로 회원들의 지도는 물론 사회교육 기관에서 후진들을 길러내기도 하고, 회원들 중에는 회장님의 기관 교육을 통해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거저 낭송이 좋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다.

무대가 암전되었다가 밝아지면서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1부는 흰옷 입은 남 회원의 무대를 여는 북소리 퍼포먼스에 이어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일제강점기 상황을 보여주는 영상과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몇 명의 출연자가 반달을 부르며 등장하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를 비롯한 몇 편을 침통하게, 비장하게, 때로는 격정과 울분에 찬 목소리로 풀어나간다. 관객들의 눈과 귀는 오롯이 무대로 모아진다.

2부는 분단, 전쟁 그리고 이산이라는 주제로 광복과 전쟁을 그리는 상황 영상에 이어 성악가가 비목을 부르고, 기다란 흰 천을 든 네 명의 출연자가 등장한다. 여 회원의 몸에 천을 감고 푸는 행위며, 끌고 끌리는 퍼포먼스를 이어가면서 시대 상황을 상징하는 시 몇 편을 낭송하고, 여 회원이 천을 휘두르며 너울너울 살풀이춤을 춘다. 관객의 몰입이 점점 깊어져간다. 춤을 끝낸 여 회원은 임진강에서’(정호승)를 애잔하고도 곡진한 목소리로 풀어낸다.

3부는 격동의 세월로 역시 상황 영상에 이어 가수 회원이 아침 이슬을 부르고, 배경 영상을 따라 희망가’(문병란)을 비롯한 몇 편을 낭송하며 아프고도 힘겨운 시대 상황을 그려나간다. 고통과 간난의 시대만 있는 게 아니었다.

4부에서는 지구가 하나로라는 주제 영상과 함께 손에 손 잡고를 부르며 등장한 출연자들이 해외여행과 학생 두발의 자유화며, 올림픽과 월드컵이 열리는 환희의 순간들을 격정 어린 퍼포먼스와 함께 시대상에 어울리는 몇 편의 윤송을 통해 역동적인 시대상을 묘사해나갔다. 점점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무대의 흐름을 따라 관객들은 숨을 죽이기도 하고, 함성과 갈채를 터뜨리기도 했지만, 눈길도 몸도 딴 곳을 향할 겨를은 없다.

마지막 제5그날이 오기까지는 내가 등장하는 순서다. 2부에서도 망향’(노천명)으로 고향 그리는 마음을 표현했지만, 듀엣으로 낭송하는 자작 수필에 대한 기대가 컸다. 주제 영상에 이어 성악가가 나와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고, 몇 편을 윤송으로 낭송했다. 모두 아름다운 서정시들이지만 오늘은 이 시들에 하나 되는 그날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기로 했다.

맨 끝 순서로 나의 수필 기다림에 대하여를 낭독하는데, 꽃피기를 기다리는 심정을 그린 글이지만, 오늘은 그날을 기리는 마음을 실어 낭독하기로 했다. 여 회원과 몇 단락을 나누어 낭독하다가 마지막 구절을 마주 보면서 간곡한 어조로 끝냈을 때, 관객들은 쟁여두었던 마음을 그 때야 다 터뜨려내듯, 탄성과 갈채가 맑고 깊은 강물처럼 쏟아진다. 망막에 물기가 어른거린다.

이 갈채가 어찌 나한테만의 것이랴. 오늘의 우리 무대에 주는 뜨거운 선물일 것이다. 출연자 모두 무대로 올라와 고향의 봄을 함께 부르며 손을 흔들 때, 그제야 관객들은 일어서서 요동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꽃다발이 밀려오고 축복의 환성들이 터져 나왔다.

그 관객들의 요동이야말로 우리에게 산이고 들이었고, 강이고 출렁이는 바다였다. 이 순간을 위하여 그 숱한 시간들을 열정으로 채워 왔던지도 모르겠다. 이제 무대가 끝이 났는가? 이 무대는 우리가 쏟아낸 열정으로 차 있는가?

출연자들이며 내빈들이 함께 무대로 나와 기념촬영을 한다. 악수를 나눈다. 수고 했다고, 감동적이었다고 하는 그 말들이 파도 같다. 출렁이는 바다 위에 떠있는 것 같다. 관객들이 빠져 나갔다. 무대도 비고, 객석도 다 비었다.

, 그런데 이제 내일 아침 산책할 때는 뭘 외야 하지? 무엇을 그리워해야 하지? 내 속의 모든 것들이 출렁 빠져나가버린 듯했다.

산이여 들이여 강이여 출렁이는 바다여!(2016.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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