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산책길 풍경

이청산 2016. 8. 6. 15:54

산책길 풍경

 

오늘도 아침 산책길을 나선다. 늘 걷는 길이지만 걸을 때마다 경이롭다. 풀잎 하나도 어제 그 잎이 아니요,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도 어제 그 방울이 아니다. 오늘도 경이 속을 걷는다.

논두렁길을 지나 숲으로 든다. 논들은 하루가 다르게 푸른색이 짙어지고 있다. 우렁이농법으로 벼를 키운다는 논엔 엄지만한 우렁이가 벼 사이를 꼬물거린다. 저 꼬물거림으로 벼가 쑥쑥 자라나고 있는가.

숲 가장자리의 상사화 꽃밭, 잎이 지고서야 꽃이 피어나는 상사화는 봄이 저물 무렵 이미 잎이 땅속으로 녹아들었는데 여름이 한 고비를 넘고 있어도 꽃 소식이 감감하더니-. 드디어 오늘 아침 움을 틔워냈다. 제 철을 잊지 않은 모양이다. 하도 반가워 폰에 담아 정다운 친구에게 보냈지만 메아리가 없다. 꽃은 피려는데 아직도 밤중인가.

소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회나무 노거수 깊은 그늘에 놓인 운동기구로 몸을 푼다. 철봉으로 턱걸이며 매어달리기를 하고, 어깨근육풀기를 돌리며 콘서트에서 낭송할 수필을 왼다. 올 여름에도 열리는 시낭송 콘서트에서, 나는 시 한 편과 자작 수필을 낭송하기로 했다. 한 해 한 번 무대를 빌어서 여는 콘서트에 참여하는 것이 내가 세상과 만나는 연중 몇 안 되는 일 중의 가장 큰 일이다.

올해는 지난해에 상사화의 개화를 기다리며 쓴 기다림에 대하여라는 나의 수필과, 노천명의 망향을 낭송하기로 했다. 무대 연습을 위해 가끔씩 한촌을 나서 도회로 가는 길은 요즈음 내 삶의 큰 활력이다.

수필을 외며 기구를 돌리다 보면 어깨가 가뿐해진다. 강둑으로 오른다. 물풀들 사이로 맑은 물이 윤슬을 반짝이며 흘러간다. 두어 해 전까지만 해도 철철이 갖은 풀꽃이 만발한 풀숲 길을 지금은 콘크리트가 덮어버렸다. 강둑에 풀이 좀 우거지면 어떤가. 걸음이 좀 팍팍한 대로 길섶에서 고개 내민 풀꽃들을 보며 시를 왼다.

폰에 녹음해 놓은 해금 연주곡을 배경음악으로 하여 언제든 가리라/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손을 들어 올리며 간절한 몸짓으로 망향을 왼다. 물소리가 마치 관객의 갈채 소리 같다.

느티나무 정자에 이른다. 정자가 아늑하다. 사백년 느티나무 그늘이 정자를 아늑하게도 하지만, 이제부터 강물이며 수풀만이 보이는 길이다. 마치 정자가 그 길을 펼쳐내고 있는 것 같다. 풀숲 길 들머리에는 달맞이꽃이 손을 흔들며 맞이하고 있다.

벚나무 우거진 강둑 위에 달맞이꽃 샛노란 꽃봉오리들이 강물을 배경으로 하얀 개망초와 함께 어우러져 있는 풍경이 꿈속의 그리운 정경 같다. 개망초는 제 철을 넘어서면서 마지막 하얀 빛을 우려내고 있다.

풀숲 길을 들어선다. 아직도 노란 애기똥풀 꽃은 제 빛을 잃지 않고 있고, 한껏 무성한 쑥대며, 익모초, 비수리 속으로 딸기덩굴도 얼크러지고 있다. 손이라도 엘 듯 새파랗게 날 선 갈잎과 함께 홍자색 꽃을 흔드는 갈퀴나물도 어우러진다.

이 풀숲 길에 무엇보다 성한 것은 칡넝쿨이다. 넓적한 잎에다가 구불구불 얼기설기 넝쿨을 뻗어 이웃하고 있는 푸나무를 가리지 않고 마구 감는다. 이웃을 타고 기어오르다 못해 저들끼리도 칭칭 물고 늘어진다.

풀을 물고 나뭇가지를 타고 자발없이 감고 기어오르면서 길을 가로막는다. 이런 것들이 있나. 법정스님이 옛사람의 말을 빌려 한 말씀이 떠오른다. “풀이 걸음을 방해하거든 깎고, 나무가 관을 방해하거든 잘라내라. 그 밖의 일은 자연에 맡겨 두라.……

넝쿨을 끊는다. 줄기를 뜯어 끊기는 쉽지 않지만 마디를 꺾으면 쉽게 부러진다. 자홍색 꽃을 어여쁘게 피우고 있는 것을 보면 애석도 하지만, 길을 막고 이웃을 감치는 걸 두고 보기는 더 편치 않다. 나는 어느 이웃을 편치 못하게 하지는 않았는가.

그래도 강둑 풍경은 살갑고도 정겹다. 칡넝쿨보다 여린 넝쿨이 얽혀져 있는가 싶더니 나팔 모양의 분홍색 꽃이 함초롬히 피었다. 나팔꽃과도 흡사한 메꽃이다. 저 진남색의 나팔꽃은 또 무엇인가. 미국나팔꽃이란다. 언제 이 땅, 이 강둑의 식구가 되었는가.

분홍 땅비싸리 자잘한 꽃들이 촘촘히 보이는가 싶더니, 연한 줄기에 오밀조밀 흰 꽃들을 달고 있는 넝쿨이 보인다. 장모의 사랑 사연이 얽힌 사위질빵이다. 풀꽃들에게 눈길을 빼앗기는 사이에 언제 이 강둑을 다 지났는가. 건너 강둑의 나무 그림자가 물속에 은은하다. 물결 따라 나뭇가지가 일렁인다. 왜가리가 슬쩍 물을 스치더니 백로가 너울 물풀 사이로 내린다.

이 풍경들을 혼자만 보고 있기가 민망스럽다. 마치 잘 차린 상 앞에 앉아 모든 요리를 혼자 탐내는 것 같다. 폰에 담는다. 달맞이꽃이 어우러진 풍경이며 함초롬히 피었던 메꽃과 함께 평화로운 강 풍경을, 맛난 것을 나누듯 시낭송모임 에스엔에스에 올린다. 시를 외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 속을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답이 날아온다.

강둑을 내려와 벼가 한창 푸러지고 있는 들길을 걷는다. 초원의 한복판을 걸어간다. 몸도 마음도 온통 파란 물이 들 것 같다. 이 벼가 다 익을 때까지 논두렁은 언제나 말개야 한다. 논두렁풀꽃들은 무시로 예초기의 날개 속에 잦아져야 한다. 푸름 속의 아픔이다.

, 하나 남았구나. 용케도 살아남았구나. 달개비꽃(닭의장풀) 하나가 남보라 조그만 두 날개를 벌리고 꽃술을 앙증맞게 내밀고 있다. 꽃말이 순간의 즐거움이라 했던가. 아니다. 너를 만나는 즐거움의 순간이다. 오늘 산책길의 끝자락을 너와 함께하여 즐겁다. 참 즐겁다.

오늘 산책길이 다하는 들판에 서서 오순도순 모여 사는 동리를 보며 다시 시를 왼다.

……언제든 돌아가리 /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시인은 돌아가지 못한 고향을 나는 지금 찾아와 살고 있지 않은가.

참 즐겁다. 이 고향 이대로 살다 죽으리-.(201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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