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찢어진 벚나무

이청산 2016. 7. 20. 21:45

찢어진 벚나무

 

날마다 아침이면 걷는 강둑길이다. 강둑길은 풀의 세상이요 꽃의 천지다. 사철 맑게 흐르는 물을 보며 걷는 즐거움과 함께 철 따라 갖가지 꽃들을 피워내는 강둑 풀숲 길을 걷노라면 다사롭고 새뜻한 정밀감이 웅숭깊게 젖어 든다.

봄을 알리는 봄까치꽃이며 산괴불주머니꽃에서부터 시작하는 한 해의 꽃의 행렬은 미나리냉이, 애기똥풀, 양지꽃, 제비꽃으로 이어져 갈퀴나물, 사위질빵 같은 덩굴풀 꽃과 함께 낮달맞이꽃, 쇠별꽃, 달개비꽃으로 철의 흐름을 알려 나간다. 개망초며 금계국이 흐드러지면 봄도 무르익어 여름으로 들고, 금불초, 유홍초, 메꽃이 풀숲을 수놓으면 갈바람이 분다. 쑥부쟁이며, 구절초, 벌개미취가 강둑을 아우르면 가을도 새근새근 깊어간다. 겨울이면 마른 풀 위에 피어나는 눈꽃은 또 어떤가.

철 따라 피는 꽃의 빛깔이며 모양도 가지각색이지만 꽃의 계절은 역시 봄이다. 잠시 왔다 가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봄꽃 중에서 절정을 이루는 것은 역시 강둑에 줄지어 서있는 벚나무들이 피워내는 왕벚꽃의 향연이다.

사월이 들면서 꽃눈을 맺어가기 시작하다가 볕 좋은 날을 골라 활짝 봉오리를 터뜨려 온 강둑은 해사하고 화사한 꽃 천지를 이룬다. 잇달아 피는 동네 뒷산의 산벚꽃과 어울려 온 세상이 꽃 천지인 듯, 꽃 활짝 핀 강둑을 걷다보면 현란하고 황홀하여 곧장 현기증이 일 것 같다.

이런 꽃 세상 속이면 당장 천지가 끝난다 해도 그대로 묻혀가도 좋을 것만 같다. 불꽃놀이처럼 터진 황홀한 세상은 찬란한 환상을 남겨놓고 또 어느 날 홀연히 가버린다. 꽃이 가버린 강둑은 소적도 하지만, 가지마다에는 화려했던 꽃의 추억이 새로운 꽃이 되어 아롱진다.

꽃이 진 자리에 파릇한 잎사귀들이 돋아나던 날의 아침도 나는 반짝이는 윤슬을 싣고 흐르는 강물이며 노란 풀꽃들이 함초롬히 피어있는 강둑을 걷고 있었다. 아니! 이런 참변이 있나! 누가 이토록 참혹한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길 쪽으로 뻗어있던 벚나무 몇 가지들이 둥치에서부터 무참히 찢어지고 처절히 꺾여 있었다. 폭풍이 불지도 않았지만, 불었다고 해도 그렇게 찢길 수가 없고, 뉘 소행이라 한들 맨손으로는 그렇게 찢고 꺾을 수가 없다. 화려했던 꽃의 기억이 무자비하게 꺾이고 찢기는 듯했다.

며칠 뒤 어느 마을 사람한테 들었다.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커다란 굴삭기 하나가 강둑 벚나무 아래로 지나가더라고 했다. 지나가는 길을 가지가 가로막으니까 버킷을 들어 내리찍은 것 같다고 했다. 강둑엔 일거리도 없었는데 왜 지나갔을까. 길을 돌아갈 생각은 않고 가지를 쳐 없앨 생각만 했을까. 소행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 무자비한 사람의 행방을 알 길도 없고, 불러 탓해봤자 잘못을 별로 깨달을 것 같지 않아 답답하고 야속하기만 했다.

날마다 강둑을 걸으면서 찢어져 맥없이 늘어져 있는 벚나무 가지를 봐야 하는 눈길이 여간 설고 아리지 않았다. 눈길만 아릿한 것이 아니라, 마치 내 사지 한 쪽이 내려앉은 느낌마저 들기도 했다.

저 걸 어찌해야 할까. 차라리 찢어진 곳을 완전히 베어내 버리는 게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무에 올라가지 않고서는 톱질을 할 수 없을 것 같고, 오르기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언제 적당한 날을 잡아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어 베어내리라 마음먹는 사이에 아린 눈길만 헤아리는 날들이 쌓여갔다.

하루 이틀, 한 주일 두 주일이 흐르고 달이 흘러가는 사이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 찢어진 가지에도 잎이 피어나고, 점점 자라 무성해져 갔다. 곧 떨어질 듯 가냘프게 붙어있는 살점으로 나뭇진이 전해져 성한 가지들과 다름없는 잎을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명줄이란 이다지도 모질고 끈질긴 것인가.

저 가지들을 어떻게 베어낼 수 있을 것인가! 잎이 저리 여상스럽게 무성하다면, 꽃도 여상스럽게 피울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리 황홀해 했던 꽃 핀 가지가 내 눈길을,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한다고 어찌 잘라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천연한 생명 작용을 어찌 짓뭉갤 수가 있을까. 달면 삼킬 것을 쓰다고 어찌 쉬 뱉을 수 있는가.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바뀌고, 아름다운 사랑이 끓는 증오로 변하는 사람살이의 일들이 새삼스레 돌아 보인다, 세상에는 자신의 비위를 따라 삼키고 뱉는 일들이 얼마나 하고하게 일어나고 있는가.

화사했던 꽃의 시절을 생각해서라도 찢어져 늘어져도 잎 무성한 저 가지를 차마 베어낼 수 없다. 어여쁜 풀꽃들이 피고 지는 강둑의 살가운 정경을 보더라도, 맑게 흐르는 물이며 산그늘 청청한 이 한촌의 티 없는 풍경을 보아서라도 그리 야박할 수 있으랴.

오늘 아침은 낫을 들고 강둑으로 갔다. 풀꽃 흐드러진 벚나무 숲길을 걷다가 찢어진 가지를 달고 서있는 나무에 이르러, 늘어진 가지를 타고 줄줄이 기어오르는 칡넝쿨들을 모두 잘라주었다. 찢기고 꺾인 것도 서러운데, 저것들이 아픈 몸통을 또 얼마나 조이랴.

내일 아침에는 더욱 생기롭고 성성한 잎을 흔들고 있으리라. 내년 봄이면 올봄의 해사하고 화사한 꽃을 다시 피워 내리라.(2016.7.15.)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이여 들이여 강이여 출렁이는 바다여  (0) 2016.08.24
산책길 풍경  (0) 2016.08.06
어머니의 교자상  (0) 2016.07.08
송강의 연인을 기리다  (0) 2016.06.24
모든 것을 다 바쳐도  (0) 2016.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