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이청산 2016. 6. 19. 11:35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여럿이 함께 하는 여행이란 언제나 황망하기 마련이다. 관심의 길이 좀 다른 사람들과의 여행일수록 더욱 그렇다. 계절마다 한 번씩 문화 유적을 찾아 그 역사와 문화의 향취를 즐겨 새기고자 하는 모임이 있다. 모임을 함께 할지라도 취향이 어찌 모두 한결 같기만 하랴.

이번 답사는 육백 년 역사를 지닌 경기도 고양의 문화를 탐사해 보기로 하고 고양의 특징적인 몇 곳을 답사지로 정하여 길을 돋우었다.

먼저 행주산성을 찾았을 때는 점심나절이 가까웠다. 임란 때 대첩의 위업을 이룬 권율 장군의 동상이며 대첩기념비와 기념관, 그리고 행주치마의 전설이 어린 토성을 주마간산으로 스치고 점심 먹으러 가기를 서두른다.

소주 몇 잔을 곁들인 점심 요기를 하고는 고양600년기념전시관을 찾아갔지만 고양 호수공원 안에 있다는 전시관에 주차 공간을 얻지 못해 주위만 맴돌다가 서삼릉으로 향했다.

잠시 달려 서삼릉에 이르렀으나, 세 능 중에 공개하지 않는 효릉은 볼 수 없고, 철종과 왕후의 능인 예릉으로 들어 안내자의 친절한 안내를 받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었다. 놀란 듯 정자각으로 들어 능의 기신제(忌辰祭)를 듣지만 비가 더 걱정이다.

비가 그치고 희릉을 찾아가자 했지만 능은 같은 모양일 거라며 그냥 나가자는 사람이 많다. 하릴없이 능역을 나와 차가 기다리고 있는 곳에 이르는데, 자형 팔작지붕으로 번듯하게 갖춰진 어느 한옥 너른 마당에 우람한 석비가 서있는 것이 보인다. 크고도 기이한 비석이다 싶어 다가가 가장자리에 서있는 안내판을 보니, 광개토대왕비라고 하며 비석의 유래를 적어 놓았다.

주인 임순형 씨가 나와 설명을 해주는데, 그가 중국 길림성 집안에 갔다가 거대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곧 광개토왕비와 그 비문을 보고 민족적인 자존감과 함께 광개토왕의 웅혼한 기상에 큰 감동을 받아, 그 비석에 버금가는 크기의 돌을 중국에서 어렵게 구하여 5년여에 걸친 공정 끝에, 비에 쓰인 1802자를 그대로 각자하여 우리나라로 들여왔다고 한다.

원비의 모양을 본떠 높이가 6.39m, 각 면 너비가 1.5m, 무게가 47톤이나 되는 빗돌을 중국에서 제작하여 국내로 옮겨와, 이 자리에 세우기까지에 든 공력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난한 과정이 많았다고 한다.

안내판의 입석 후기에서 밝히듯 우리 선조들의 불굴의 기개와 웅혼한 기상을 후손에게 길이 전해 주고자하는 굳은 뜻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비용은 얼마나 들었느냐고 물으니, 선조의 높은 뜻을 기리는 일을 어찌 값으로 매길 수 있을 것이냐며 웃었다.

또한 임 씨는 광개토대왕의 기상과 정신을 현창하기 위하여 대왕의 기일인 매년 음력 구월 스무아흐레에는 각계의 협조를 받아 강연과 시낭송, 음악회 등으로 추모제를 연다고 했다. 지금까지 열한 번째 행사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을 이루어 내기까지 재력만 있다고 어찌 할 수 있는 일일까? 역사와 민족에 대한 인식과 긍지 없이는 해낼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임 씨의 우직하다 싶기까지 한 열정과 비석의 엄청난 규모에 대한 경탄을 안고 차에 올라 송강마을로 향했다.

고양의 송강마을을 기사도 잘 몰라 내비게이션으로 검색해도 잘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대로 귀로를 달려가자는 일행을 달래면서 겨우 길을 찾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는 송강마을에 닿았다. 차에 남을 사람은 남고 몇 사람이 송강문학관을 찾아가는데, 이은만 관장이 마중을 나왔다.

송강마을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주옥 같은 가사 작품을 남긴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 부모의 시묘를 살면서 기거한 곳으로, 송강이 살던 집을 문학관으로 꾸며 그를 기리고 있다고 했다.

이 관장의 안내를 받아 마을 안 산자락 밑에 자리하고 있는 문학관에 들어가니 송강의 시 몇 편과 몇 사람의 휘호가 걸려 있고 고서 몇 권이 진열되어 있을 뿐이었다. 조금은 실망감도 느끼며 이 관장의 설명을 들어나갔다.

옆 동네가 고향인 그는 지금 송강마을에 살면서 문학관을 관리하고 있는데,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듣던 송강고개, 송강낚시터, 송강보가 정철의 그 '송강'을 뜻하는 줄은 몰랐다고 한다. 고양의 지명유래집을 만드는데 참여할 기회가 있어서, 그 때 송강이 이곳 마을의 아름다운 산천을 작품에 담으며 10여 년 동안 머물었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와 송강의 행적을 찾아내기 위해 애를 써 부모와 장자의 묘를 찾아 단장하고, 평생 송강을 섬기며 따르던 의기 강아(江娥)의 묘를 발굴하여 송강과의 얽힌 사연을 새긴 표지석을 세웠다고 한다.

송강의 업적과 정신을 선양하기 위하여 각계에 동참을 호소하는 한편, 스스로 사재를 털어 문학관과 시비공원을 조성하고, 해마다 송강문학제를 열어 송강의 문학을 널리 알림은 물론 청소년들을 위한 인성교육의 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고양에는 왕릉을 비롯한 국보급 문화재가 흔하다 보니, 그의 이러한 활동에 당국의 관심과 지원을 받아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한글을 더욱 빛나게 한 송강의 공적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에 못지않은 것임을 굳게 믿으며, 그 믿음을 위해 여생을 바칠 것이라 했다.

신원동 큰길가에 자리 잡고 있는 그가 조성한 시비공원에는 임창순(任昌淳) 선생이 휘호한 松江鄭澈詩碑라는 큰 비석과 함께 이 관장이 정철과 송강마을의 내력을 새긴 비석이며 송강의 시, 송강의 제자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이 송강 유택을 찾은 감회를 적은 시비를 세워 놓았다.

시비공원을 함께 거닐며 이 공원을 조성하는데도 만난을 무릅써야 했지만, 앞으로도 송강마을을 알리고 송강 문학을 드높이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쳐나갈 것이라며 76세 이 관장은 비장한 각오를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역사가 무엇이고 문화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러한 일에 모든 것을 바치려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바라 하는 일인가? 누가 말로만 역사와 문화의 소중함을 이를 것인가!

갖은 힘을 다 들여 거대한 광개토왕비를 본떠 세우고, 문학관을 열고 시비를 하나하나 세워나가는 임순형 씨와 이은만 관장을 보며, 사람살이에 있어서 가치로운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뜻있게 사는 길인가를 겸허히 돌아본다.

이들을 보면서 문화 답사라는 오늘 우리의 발길이 민망하고 소적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조상의 위업을 기리는 일을 어찌 물질로 값을 매길 수 있을 것이냐는 임 씨의 웃음소리며, 송강을 받드는 일에 여생을 걸겠다는 이 관장의 비장한 말씀이 귀로를 달리는 내내 목 안의 가시처럼 귓속에 걸려 있다.

오늘 걸음의 뜻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차는 무심히 귀로를 달려 나가고, 차 안을 울리는 흘러간 가락과 함께 소주잔이 방향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오간다.(2016.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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