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무는 죽지 않는다

이청산 2016. 6. 12. 21:11

나무는 죽지 않는다

 

오늘도 어김없이 해거름 숲정이 산을 오른다. 오롯한 나의 일상이다. 언제 올라도, 어느 때 보아도 늘 변함없이 있어주고 반겨주는 모습이 즐겁고도 기쁘다.

아니다. 산은 늘 변한다. 오를 때마다 걷는 곳마다 변하기를 거듭하고 있다. 늘 변하면서 돌고 도는 자연의 이치를 의연히 보여주는 그 변신이 기쁘고도 즐겁다.

엊그제만 해도 올괴불나무, 생강나무, 벚나무, 분꽃나무, 물푸레나무, 진달래, 조팝나무 들의 나무 꽃이며, 봄맞이, 그늘사초, 솜나물, 꽃마리, 제비꽃, 구슬붕이, 붓꽃, 미나리아재비 같은 풀꽃들로 온통 꽃 천지를 이루더니, 오늘은 상수리, 떡갈나무, 신갈나무, 생강나무 넓은 잎이며 굴피나무, 층층나무, 벚나무, 쥐똥나무, 화살나무, 노간주나무 올망졸망한 잎새들이 온 산을 무성하게 덮고 있다.

꽃 세상일 때 산을 오르면 사방을 둘러친 꽃 벽, 꽃 감옥에 갇힌 것 같아, 이런 아름답고 행복한 옥살이면 생을 다 바쳐 옥을 살겠노라며 차라리 주저앉아버렸던 흥분이 상기도 가시지 않았는데, 이 푸른 빛깔들은 누가 내린 것인가. 이 싱둥한 생명들은 또 어디서 온 것인가.

우거진 푸름 속을 걷다 보면 온몸에 잎파랑이가 한가득 차오는 것 같다. 어깨, 겨드랑이, 등판 어디쯤에서 잎 넓은 푸른 잎이 숭글숭글 솟구치고 있는 것 같다. 누가 세상의 나이를 묻는가. 내 나이는 오직 푸름일 뿐이라 소리치고 싶다.

나무가 되고 싶다. 짙은 잎파랑이로 솟아나는 나무가 되고 싶다. 성큼하게 솟아오른 둥치, 시원스레 뻗은 가지에 풋풋한 잎사귀 빽빽이 달고 있는 나무가 되고 싶다. 그렇게 서서 그렇게 산을 얽고 싶다. 그렇게 쩍말없이 살고 싶다.

아니다. 산에는 하늘을 향해 쑥쑥 솟아있는 싱싱한 나무만 사는 게 아니다. 죽죽 뻗어 있는 가지에 푸르고 싱그러운 잎사귀를 치렁치렁 달고 있는 나무들만 사는 것이 아니다. 그 잎사귀들이 한여름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그 가지에 뭇 새들 날아와 노니는, 그런 나무들만 사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지 숨이 넘어가버린 듯 잎을 죄다 떨어뜨리고 마른 가지만 앙상하게 달고 있는 나무도 있고, 오래 전에 고사한 둥치가 풍화작용을 못 견뎌 가지가 찢기고 껍질도 다 벗겨져 백골처럼 서 있는 것도 있다.

뿌리가 다 말라 서 있을 힘마저도 모두 잃고 어느 날 불어 닥친 폭풍에 기진하여 쓰러져버린 것도 있고, 쓰러지다가 옆의 나무에 맥없이 붙어버린 것도 있고, 쓰러진 지가 오래 되어 비바람에 씻기고 닳아 형해만 겨우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자취마저 희미해져가며 낙엽이며 흙과 섞여 만지면 금세 흙으로 부스러져버릴 것도 있다. 어떤 것들은 이미 흙이 되고 잘 썩은 토양이 되어 기름진 거름으로 변하기도 했을 것이다.

살고 죽는 것이 이러한 것인가. 이리 푸르고 우람한 것들도 목숨을 마칠 때가 있어 우러르던 하늘을 버리고 낮고 낮아지다가 마침내 땅속으로까지 들어가고 만다. 산에는 싱싱하고 성성한 삶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죽음도 있는 것이다.

내가 나무가 된다면 어찌 온몸에 가득 찬 잎파랑이로 푸르고 싱싱한 잎을 피우는 것으로만 살 수 있을 것인가. 언젠가는 저렇게 숨이 넘어가고 쓰러지고 썩어지고 마침내 흙이 되고 마는 나무도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게 죽어가야 할 것 아닌가.

나무가 되고 싶다. 그래도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다. 살아서는 봄 되어 찬란한 꽃을 피우다가, 여름이면 싱그러운 숲을 이루다가, 가을은 열매도 맺다가, 겨울에는 한 철 삶을 되새기며 사색에도 젖다가, 그런 계절들이 쌓이고 쌓인 끝자락에서 미련 없이 쓰러져 가는 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나무는 제가 난 자리를 굳건히 살다가, 제가 난 자리에서 쓰러져, 제가 난 자리에서 오롯이 썩어, 제가 난 곳으로 돌아간다. 모든 살이며 뼈며 피며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가져간다.

아니다.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갈무리하여 흙이 되고 땅이 되는 것이다. 제가 땅에 남긴 씨앗들이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제 몸 모두 땅으로 간직해 가서 다시 생명 되어 태어난다. 깨끗이 씻은 몸에 옷을 갈아입는 거라고나 할까. 나무는 결코 죽지 않는다. 생명의 옷을 갈아입을 뿐이다.

나무가 되고 싶다. 결코 죽지 않는 나무가 되고 싶다. 잠시 지친 몸을 이끌고 청정한 욕장으로 들어 깨끗이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유쾌한 욕객 같은 나무의 삶이 되고 싶다. 거기 어디에 삶이 따로 있고 죽음이 따로 있으랴. 삶과 죽음이 어찌 다를 수가 있으랴.

우거진 숲길을 걷는다. 산 나무와 죽은 나무가 함께 사는 산속을 걷는다. 삶과 죽음이 한 자리에서 어우러지고 있는 세상을 걷는다. 이런 산이 좋다. 결코 죽지 않는 나무가 좋다.

나무는 죽지 않는다. 나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새 옷을 갈아입을 뿐이다.

오늘따라 하늘이 푸르고도 높다. 하늘을 떠가는 한 점 흰 구름이 정겹다.(201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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