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빈집의 깊은 뿌리

이청산 2016. 2. 23. 21:35

빈집의 깊은 뿌리

 

시골 마을에 사람과 집이 자꾸 줄어드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내 찾아와 살고 있는 풍광 좋은 이 한촌도 물론 그런 마을 중의 하나이다. 마을에 빈집이 또 하나 늘었다. 담장 옆에 모과나무 고목이 서 있는 집에 혼자 살고 있던 모개나무할매가 세상을 떠났다. 시름시름 앓으면서 아들네 집과 병원을 오가던 할매가 마침내 유명을 달리하자 조그만 동네에 빈집이 네 곳이나 되었다.

세 곳은 오래 전에 빈집이 되어 거의 허물어져 가거나, 한 곳은 아예 집이 없어지고 잡초 무성한 터만 휑하게 남아있다. 지난해에도 혼자 집을 지키고 살던 건넛집 할매가 세상을 떠나 빈집이 늘 뻔했지만, 다행이 지금 그 집은 누가 빌려서 쓰고 있다.

모개나무할매는 세상을 떠나도 집은 아직 모든 것이 그대로다. 할매가 앉아 놀던 마당의 평상도 그대로고, 할매가 끌고 다니던 보행보조차도 곧장 방에서 나올 주인을 기다리듯 서 있고, 할매가 엮어서 추녀 끝에 달아놓은 누런 시래기도 그대로 달려 있다.

객지의 자식들은 당분간은 모든 것을 그대로 둘 것이라 한다. 어머니의 손때가 묻고 정이 깃들어있는 것을 쉬 거둘 수가 없다고 한다. 집도 언제까지나 이대로 두고 가끔 찾아오겠다고 한다. 태어나고 살던 집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뒷골의 두 빈집은 농촌 살이가 한창 힘들고 어려울 때 살 길을 찾아 도회지로 나가면서 두고 간 집들이라 한다. 빈집이 된 지 오래라 겨우 붙어있는 문짝은 문살도 부러지고. 먼지가 까맣게 앉아 있는 방 안엔 몇 가지 가재도구만이 널브러져 있을 뿐이다.

집임자들은 살기가 바빠 고향집을 돌볼 겨를은 없었겠지만, 소문을 들어보면 타향에서 제법 탄탄하게 살고들 있다고 한다. 도회지에서 기반을 잡고 살면서 남아있는 집은 왜 처분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기약은 없지만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라 한다고 했다.

허물어진 집은 없애고 터만 남겨놓은 앞골의 빈집 주인은 이십여 년 전 외국으로 이민 간 자식들을 찾아갔다가 함께 이민자가 되어 지금은 먼 이국땅에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을 들어보면, 그 집도 역시 언젠가는 조국으로 다시 올지도 몰라 터만이라도 잡아두고 있다는 것이다.

객지에서, 이국에서 터를 잡아 잘 살고 있으면서 과연 고향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몸은 비록 타방을 살고 있어도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의 끈을 결코 놓을 수 없는 모양이다. 몸은 돌릴 수 없을지라도 마음은 대대로 살고 태어나고 자란 고향땅에 묻어두고 싶은 것 같다.

귀농, 귀촌하고 싶은 사람들이 그 빈집이며 빈터의 임자를 수소문하여 넘기기를 간청해도 한사코 잡고 있으려 한다는 것이다. 집이야 다 허물어져도 터는 꼭 잡고 있겠다는 것이다. 자식들도 고향이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그 집이며 터는 결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임자들의 든든한 마음의 뿌리가 굳건하게 살고 있다.

세상을 떠난 모개나무할매 집의 자식들이 어머니의 유품들을 쉽사리 거두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 뿌리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는 조상님들이며 부모님들의 숨결이 어려 있고 어린 시절의 애틋한 기억들이 절절히 배어있는 고향집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정든 고향의 빈집은 어느 시인이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기형도, ‘빈집’)라며 사랑을 잃은 아픔과 그 절망을 노래했던 그런 허무의 빈집은 결코 아니다. 비어 있지만 그리는 마음이 가득 차 있고, 그 마음의 뿌리가 지금도 모락모락 자라고 있는 집이다.

세상을 떠나든, 마을을 떠나든 세월의 흐름을 따라 마을에 빈집은 또 생겨날 것이고, 언젠가 나의 집도 빈집이 될 때가 올 것이다. 나야 이 마을이 좋아 찾아와 살고 있기에 집 두고 떠날 일은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난들 영원히 살 수 있을까.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 나의 집이 빈 집이 된다면, 내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

부모님의 유흔이 깃들어 있는 곳이라고, 어느 할매 자식들처럼 중히 갈무리하려 할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한 생애를 새로이 열면서 산수 좋은 곳이라 찾아와 살며 나도 이제 겨우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참인데, 내 아이들이야 마음에 무슨 뿌리가 있을 것인가.

어찌하라 할 수는 없지만, 내가 사랑하여 찾아와 살던 마을, 마음을 깊숙이 묻고 살았던 집이었음을 기억으로나마 챙겨주기를 바랄 뿐이다. 저들 마음의 고향으로 삼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일까.

그래도 이 한촌에 살고 있는 것이 즐겁다. 도시 같으면 아무리 태어나고 살던 곳이라 하나 집을 비워두기나 할 수 있을 것이며, 비워두었다 한들 마음의 깊은 뿌리를 박아두려 할까? 도시의 집이야 곧 재물이요, 긴요한 생존의 방편 아니던가.

한촌의 집은 재물에 대한 탐욕도, 생존을 위한 욕구도 다 넘어설 수 있는 곳이다. 오직 그리움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지켜낼 수 있는 곳이다. 사랑 하나 만으로 세상살이의 간난을 이겨낼 수 있는 곳이다.

산수도 인심들도 정겨운 한촌이 아니고서야 이 애틋한 마음의 뿌리를 어찌 간직할 수 있으랴. 한촌은 빈집도 따뜻하다. 마음의 깊은 뿌리가 살고 있어 포근하다. 그 정 깊은 뿌리로 사는 마을이 좋다. 그 마을을 살고 있는 삶이 따사롭다. (201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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