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봄 되어 살고 싶다

이청산 2016. 3. 12. 14:17

봄 되어 살고 싶다

 

동창에 은은히 무늬져 오는 새소리에 창문을 여니 밤새 잔비가 살며시 다녀 간 듯 마당이 살포시 젖어 있다. 화단의 매화나무는 곧 꽃을 터뜨릴 듯 봉긋이 맺힌 꽃눈에 남은 빗방울이 송알 맺혀 있고, 가지는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다.

아침 산책길을 나선다. 겨우내 몸을 감쌌던 두터운 덧옷을 밀쳐두고 가벼운 운동복을 입고 집을 나서 고샅을 지나 두렁길을 걷는다. 어느새 피었나! 조막손 같은 파란 잎사귀 위로 보일 듯 말 듯 하늘빛 조그만 꽃들이 송송 피어있다. 큰개불알꽃이다. 봄이 왔구나. 봄이로구나.

강둑길을 걷는다. 물이 많이 불었다. 지난밤 조용히 다녀간 잔비가 저리 붇게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곳곳에 움츠리고 있던 겨울 물들이 이제야 기지개를 켜고 서로 어깨 결으며 흘러나온 모양이다.

물소리가 새롭다. 한결 또랑하다. 마른 갈대 서있는 물기슭을 돌고 자갈돌을 건너짚으며 흐르는 품에 한층 힘줄이 서려있다. 도란도란 속삭이듯 흐르다가 보에 이르러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강둑에 선 나무 그림자를 품에 넌짓 품는다.

머잖아 해사한 꽃들의 잔치를 벌일 강둑의 벚나무들은 옛 벗이라도 만난 듯 손 반갑게 내미는가 싶더니 은근슬쩍 물의 품에 안긴다. 명지바람일까, 가는바람 살짝 불어 흔들리는 가지에 송알송알 맺힌 꽃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듯 눈망울을 초롱인다.

새 볕 내린 산을 오른다. 언제나 해거름이면 오르는 걸음이다. 칼바람, 고추바람 불던 겨울날도 산에 들면 포근했다. 나무가 바람을 얼러주고 깔린 잎이 훈기를 내주었다. 그 차가운 날도 오직 안길 곳은 산이었다.

오늘 더욱 아늑하고 편안하다. 정든 옛사람 품에 안긴 듯하다. 푸른 솔잎이 한결 새뜻해 보인다. 봄이 온 줄 아는가. 이끼 낀 저 둥치에 젖은 물기는 무엇인가. 나래를 펴듯 가지를 뻗쳐들고 봄맞이를 서둘고 있는 것 같다.

뻗어 올라간 긴 둥치에 가만히 귀를 대어본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 잎들이 몸 비비는 소리일까, 지나는 바람결이 우려내는 소리일까? 필시 그 소리다.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다. 물오르는 소리다. 생명을 나르는 소리임에 틀림없다.

지난가을 떡갈나무 마른 잎이 아직도 달려 있다. 다른 나무는 봄물을 한창 갈무리하고 있는데, 아직 가지 끝에 달려 어쩔 참인가. 갈 때가 되었음을 알리라. 겨울눈이 얼세라 싸안아 찬바람을 막아주다가 새눈이 솟는 날 미련 없이 지상으로 내릴 저 잎, 벌써 제 떨어질 자리를 봐두고 있으리라.

고즈넉한 숲길을 표표히 걷는다. 귓불을 간질이는 바람소리와 함께 마른 우듬지를 수놓는 새소리가 한결 청랑하다. 연둣빛 음표가 가벼운 춤사위를 그리며 날아다니는 것 같다. 어제는 들을 수 없던 저 소리는 어디서 우러나온 것인가.

내일이면 올괴불나무에 자잘한 꽃이 돋고, 산자락 봄의 전령 생강나무가 꽃눈을 내밀고, 조금만 기다리면 산벚나무도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움 돋우어 꽃을 피워 낼 것이다. 또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저 강둑의 왕벚나무 행렬과 더불어 현란한 꽃 세상을 이루며 마을을 온통 울긋불긋 대궐로 꾸밀 것이겠다. 그 날을 위하여 긴 겨울을 인내해 온지도 모르겠다.

어둡고 시린 긴 터널을 지나온 것 같다. 지난겨울 어느 한 때는 몹시도 추웠다. 온몸을 에어낼 듯한 강추위가 몰아쳐 왔었다. 북극 지방의 극 소용돌이(polar vortex)라는 한랭기류가 제트기류를 뚫고 남하했기 때문에 발생한 한파라 했던가. 어찌하였거나 바라볼 오늘 같은 봄날이 없었다면 그 추위를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새맑은 햇살과 함께 꽃 천지를 이룰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며 그 추위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드디어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다. 내 삶 속에도 사철이 제 철의 빛깔과 대기를 가지고 오고갔을 터이지만, 겨울이 좀 잦고도 길었던 것 같다. 나의 극 소용돌이였다 할까, 남들처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몸과 마음의 덩둘한 이력이 내 삶을 아리고도 시리게 했다.

그 때 그 추위 속에서, 언젠가는 내게도 찾아올 봄을 바라며 살아왔다. 나의 바람은 헛되지 않았다. 쌓이는 세월의 더께 위로 드디어 봄이 내려앉았다. 추운 날 많았던 한 생애가 가고 새로운 봄날의 생애가 내게로 온 것이다.

오늘 뒷모습을 보이며 저만치로 가고 있는 겨울처럼 나의 겨울도 꼬리를 거두어 가고, 지금 나는 따사로운 봄 속을 살고 있다. 내게 쌓여 있는 세월이 만들어낸 봄일 테다. 맑게 흐르는 물소리, 밝게 나는 새소리가 내 봄의 문채를 새겨주고 있다. 세월의 선물이다.

겨울 끝의 이 봄을 소중하게 맞을 일이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을 돌아보면 오늘의 봄기운이 얼마나 고마운가. 가슴 벌려 모든 것을 반가이 맞고 싶다. 다시는 가지 않을 나의 봄으로 만들고 싶다. 영원한 나의 세월로 잡아두고 싶다.

봄볕 내려앉은 강둑 산책길을 걷는다. 물소리가 맑고도 산뜻하다. 봇물이 품고 있는 나무 그림자가 은근하다. 포근한 기운에 몸을 맡기며 산을 오른다. 물오르는 소리, 움트는 소리, 연둣빛 새소리가 그윽한 변주곡이 되어 들려온다.

봄처럼 살고 싶다. 봄 되어 살고 싶다. 언젠가 찾아올 영원의 봄 생애도 오늘처럼 기껍게 맞고 싶다.(20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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