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기다림으로 가는 여정

이청산 2016. 1. 12. 14:56

기다림으로 가는 여정

 

해가 바뀌었다. 어제가 가고 오늘이 오듯 해가 바뀐다고 해서 일상이 크게 변할 일은 없지만, 해가 달라질 때마다 나는 새로 하는 일이 하나 있다. 올해도 그 긴 여정을 시작했다.

내 수필을 하나 외는 것이다. 듣는 이를 생각하여 4,5분 동안에 욀 수 있는 분량으로 추려 외는 것이지만, 나름 공이 적잖이 드는 일이다. 그 일은 삶의 생기를 돋게 할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신공(申供)과도 같은 일이 되고 있다.

낭송 낭독을 즐겨하는 사람들끼리 모임을 만들었다. 좋은 글, 아름다운 시를 가려 열심히 외고 정감 있게 낭송하는 연습을 하다가 한 해 한 번 가을 들머리쯤에서 무대를 빌어 콘서트를 연다. 그 게 벌써 서너 해째가 되었다.

나는 수필이랍시고 쓴다며 콘서트를 열 때마다 수필 낭독을 맡는다. 근년 들어 새해를 맞으면 늘 올해 낭독할 수필을 생각한다. 지난 한 해 동안에 써온 것 중에서 낭독하고 싶고, 낭독하기 좋은 글을 고르는데, 둔필 탓인지 적절한 글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며칠을 두고 고심한 끝에 한 편이 골라지면 적당한 양으로 발췌하여 읽기를 거듭한다. 되풀이하여 읽으면서 붙여 읽거나 띄어 읽을 곳이며, 부드럽게 넘기거나 강조하여 읽을 곳을 새겨나간다. 어떻게 하면 쓰면서 생각했던 정감을 잘 살려낼 수 있을까.

낭독이라 하지만 죽죽 읽어 내리기만 해서는 느낌과 분위기를 제대로 살릴 수가 없을 것 같다. 한 구절 한 구절씩 외어 나간다. 머릿속에, 가슴속에 고스란히 들어앉을 때까지 외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애쓰는 사이에 조금씩 내 속으로 들어와 다 외게 되면 수십 번, 수백 번을 거듭 외며 다듬어 나간다.

아침 산책을 하면서도 외고, 자전거 운동을 하면서도 외고, 해거름 산을 오르면서도 왼다. 외기는 어느 새 나의 일상이 되고, 내 삶의 한 부분이 되고, 내 살아있음의 다소곳한 증거가 되어간다. 콘서트가 열릴 때까지, 해가 바뀔 때까지 가는 길고도 느꺼운 여정이다.

첫 콘서트 때는 생일을 맞은 감회를 이야기한 생일 풍경이란 글을 외었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마음의 눈을 더욱 맑게 닦아, 세상 모든 소리가 오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웃음소리와 손뼉소리로 들릴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이듬해에는 자전거를 달려 나가는 길섶에 짙붉게 핀 샐비어를 보고 나는 언제 삶을 그렇게 불태워 보았던가. 나의 불탈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가.”고 외치며 불태울 여생을 재어보는 샐비어를 외었다. 지난해에는 넓고도 깊고, 은근하고도 따뜻하고, 넉넉하고도 포근한 가슴을 그리는 산의 가슴을 외었다.

올해는 무엇으로 할까? 지난 한 해 동안 써놓은 글을 뒤적이다가 문득 기다림에 대해 쓴 글에 눈이 갔다. 몹시 가물었던 지난여름 쉬 피지 않는 상사화의 개화를 기다리는 간절한 심정을 쓴 글이다. 기다림이란 사랑과 동의어인지도 모른다며, 사랑이란 간곡한 기다림의 나무에 열리는 달콤한 과실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라 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기다림이란 그런 것 같다. 내 삶의 자취를 다시 돌아보아도, 내 살아온 원천은 바로 기다림이었던 것 같다. 나에게 기다림이 없었다면, 그리 녹록하지만도 않았던, 적이 신산한 시간 속을 헤매기도 했던 내 지난 세월들을 어떻게 살아올 수 있었을까.

그 기다림 끝에 사랑이라는 달콤한 과실이 달리기라도 한다면 오죽 좋을까만, 어느 시의 구절처럼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좋았다. 지금도 나는 무언가를 마냥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기다림은 그대로 내 삶의 오롯한 여정이 아닌가. 그 글을 외기로 했다. 기다림을 외기로 했다. 그 새로운 여정을 나서기로 했다.

내가 글을 외는 일은 무엇이던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는 일이기도 했고, 살아갈 삶을 그려보는 일이기도 했다. 글을 외다가 보면 지나온 내 삶이 열없기도 하고 아릿하기도 하여 때로는 까닭 없는 눈물이 어른거리기도 한다. 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외고 외어서 내 속에 온전히 들게 하는 일은 내 삶을 익혀 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살아가고 살아가도 온전한 삶법을 깨칠 수 없는 삶을 위하여, 사랑하고 사랑해도 따뜻한 사랑법을 익힐 수 없는 사랑을 위하여 글을 외고 왼다. 또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그 물음을 안고 올해의 콘서트를 향하여 나아간다. 올 한 해의 삶을 향하여 나아간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지만, 만남의 운명이 나에게 있다면 더불어 마음을 나눌 관객들을 만나고 싶다. 내 그리운 삶을, 사랑을 만나고 싶다.

그 만남을 위하여 기다림으로 가는 여정을 나선다. 기다리며 사는 삶의 여정을 나선다.

또 어떤 글로 내년을 기약할 수 있을까. 그 여정을 갈 수 있을까.(20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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