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아름다운 소풍

이청산 2015. 7. 5. 21:09

아름다운 소풍

 

나는 누구들처럼 내 한 생애를 정리하거나 마무리 지을 때쯤 해서 회고록이라는 걸 결코 쓰고 싶지 않지만, 만약 회고록을 쓴다면 무엇을, 어떻게 쓸 수 있을 것인가를 잠시 생각해볼 때가 있다.

원로 수필가 K 선생은 지난날의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일들을 회고하며 감회에 잠기는 글을 많이 쓴다. 그 분의 추억에 관한 글의 소재는 유년 시절부터 현재에 가까운 과거에 이르기까지 혼자만의 아름다운 추억이며, 더불어 살았던 사람들과의 인연에 얽힌 이야기 등 실로 사람 사는 일의 모든 부분에 걸쳐 참으로 다양하다.

시골 고등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아 갔을 때, 악대를 창설하고 싶어 하는 교장선생님의 명을 받아 고교 시절 악대부에서 트럼펫을 불었던 자신의 악대 경험을 살려 예쁜 여자 음악선생과 함께 악대부를 만들기 위해 애쓰면서 트럼펫의 선율과 함께 맑고 고운 꿈을 엮어 갔던 추억을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처럼 풀어내기도 했다. 꿈결 같은 이야기였다.

나도 이제는 반평생도 훨씬 지나 황혼녘을 향해 내달아 가고 있다. 내 머리와 가슴속에는 어떤 기억, 무슨 추억이 채워져 있는가. K 선생의 아름다운 추억 이야기는 지나온 내 삶을 돌아보게 한다.

어느 대학교수님은 제자의 결혼식 주례사에서, 인생을 하나의 책으로 생각한다면 인생에는 상권, 중권, 하권의 3책이 있다고 했다. 상권은 태어나서 결혼할 때까지, 중권은 본인이 결혼할 때부터 자식이 결혼할 때까지, 하권은 자식이 결혼한 다음부터 이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생애를 3막으로 갈라본다면 제1막은 태어나서 자라나 학업을 마칠 때까지, 2막은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은퇴를 맞이하기까지, 3막은 은퇴 이후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지금 하권, 3막의 생애를 살고 있다.

교수님은 상권을 거쳐 맞이하는 중권의 생애는 본인의 노력과 인생관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기간이라고 했다. 1막으로 시작된 내 삶의 중권, 2막은 또 어떻게 살아왔던가. 돌아볼수록 아릿하고 무람한 기억과 느낌만이 차오르는 것 같아 가슴이 울울하고도 아리다.

내 생애의 제1막에서 나는 부모님께 늘 애탐과 아픔만 드렸던 것 같다. 공부를 잘 하지도 못했고, 뛰어난 재주도 없었다. 학창 시절은 별로 열심히 살지도, 편하게 지내지도 못했다. 그 무렵 심신이 그리 실팍하지를 못했던 것 같다.

학업을 마치고 바로 사회생활에 임하여 우여곡절 속에서도 퇴임 때까지 그런대로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 여겨지지만, 돌아보면 부끄러움뿐이다.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 기여해 본 일도 별로 없고 그럴 능력도 갖지 못한 채 살아왔다. 갈등과 번민, 실수와 시행착오로 온 삶이 점철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생애를 마감하고 물러나온 것이 회한으로 남을 뿐이다.

천성이 마르고 둔해서였을까? 나는 누구를 열렬히 사랑해보지도 못한 것 같다. 오히려 나로 인해 불편과 아픔을 겪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달아오른다. 내가 사랑할 줄 몰랐으니, 누구의 순정을 바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나에게 어찌 애틋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존재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내 몸 속에는 이 세상을 아름답고 보람되게 살 수 있는 인자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세상을 잘 적응해서 세상의 이치에 맞게 살아낼 수 있는 재주와 능력이 나에게는 척박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이 세상을 살아오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으며, 고심인들 적었을까. 이다지도 덩둘한 나를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게 해준 세상과 사람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가정을 일구어온 주인공 덕수는 설날을 맞아 북적대는 가족을 보며, 혼자서 안방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아버지, 저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저 진짜 힘들었거든예!”라고 하던 말이 관객의 심금을 울리게 했다.

나는 내 살아온 생애를 두고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 자신에게 말해 주고 싶다. “이 사람아, 참 수고 많았네. 살기에 별로 알맞은 몸속 얼개도 못 갖추었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가.” 그리고 한번 웃을까.

따뜻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없어서 K 선생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쓸 수 없는 것은 과거의 탓이 아니다. 과거를 만들어 내었던 내 현재의 탓이었을 뿐이다. 부실하게 산 현재들이 부끄러운 과거를 만들지 않았던가.

이제, 나는 제3막의 삶을, 종막의 삶을 엮어나가고 있다. 지금 지나온 내 삶을 부끄러움과 회한으로 되새기는 것처럼, 삶의 마지막 자리에서 또 무슨 회오를 안아야 할까.

때늦은 탄식일지나 이제부터라도 현재를 잘 건사해야겠다는 심회를 가져본다. 허허바다의 허허로운 기약이 될지 모를 일이지만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사는 것으로 아름다운 현재를 꾸며 나가고 싶다. 맑은 바람과 고운 사람을 그리워하고, 푸른 하늘과 그리운 사람을 사랑하면서 미움도 시기도 없이 살고 싶다. 인위의 각을 세워 가슴을 끓이는 일이 없는 무위의 삶을 살고 싶다.

그리하여 제3막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느 시인의 절창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천상병, ‘귀천’)하며 말없는 회고록을 쓰고 싶다.

세상 참 아름다운 소풍을 했다고-.(2015.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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