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무는 늙지 않는다

이청산 2015. 5. 20. 18:32

나무는 늙지 않는다

 

해거름 산을 오른다. 날마다 오르는 내 일상의 걸음이다. 산을 오르고서야, 그 넉넉하고도 싱그러운 기운에 흠뻑 젖고서야 내 하루가 마무리 길로 든다.

자욱한 소나무, 벚나무, 생강나무 숲속을 걷는다. 물푸레나무며 분꽃나무가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여인의 살 내음 같은 분꽃나무 분내가 숲을 그윽하게 한다. 진달래도 철쭉도 지고 풋풋한 잎들이 꽃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노간주나무도 침엽을 곧추 세우며 뭇 나무들과 어깨를 겨룬다.

차디찬 겨울을 의연히 이겨낸 까닭일까. 우뚝 솟은 소나무의 사이를 스치는 바람이 향기롭다. 지난 봄날 온 산을 해사한 꽃으로 수놓던 벚나무는 하늘 향해 푸른 잎들을 무성히 펼쳐 들고 있다. 노란 꽃을 피워 맨 먼저 봄을 알리던 생강나무는 손바닥 잎을 종종 달고 하늘거린다. 맨 가지에서 파릇파릇 눈을 내밀던 화살나무에도 푸른빛이 짙어가고 있다.

여린 겨울눈을 싸안아 설한풍을 지켜주던 참나무 단풍나무 마른 잎은 슬쩍 땅으로 내려앉고 그 자리엔 어느 새 새잎이 새뜻하다. 저마다 독특한 생김새를 가진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참나무 족속의 넓은 잎들이 숲을 싱싱하게 채운다. 새로 돋은 단풍나무 잎은 곱게 물들 가을을 그리며 윤슬 같은 빛을 반짝인다.

온갖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진 숲속에 서서 나무를 본다. 하늘 향해 우뚝 솟은 나무도 있고, 솟구쳐 있는 나무를 바라며 솟고 있는 것도 있다. 숱한 세월을 싸안은 듯 아름드리 큰 나무도 있고, 처음 세상의 빛을 쪼이는 듯 한창 자라나고 있는 여린 가지도 있다. 세상 근심 모르고 티 없이 잘 자란 나무도 있고, 천지 풍상을 다 겪은 듯 외틀어지고 비틀어진 것도 있다.

살아있는 나무만 숲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니다. 하늘 향한 꿈을 미처 피우기도 전에 온몸이 말라버린 나무도 있고, 무엇의 침노를 받았는지 부러지고 꺾인 것도 있다. 나목, 고사목이 되어 호젓이 서있는 나무도 있고, 천명을 다했는지 한 자리 잡아 벌렁 누워버린 것도 있다.

저렇듯 세상의 명을 다한 나무들이 있을 지라도, 살아 있는 나무는 모두들 꽃을 피우고 잎을 돋우어 낸다. 작은 나무는 작은 대로, 오래된 나무들은 오랜 대로 푸르고 싱그러운 숲을 이룬다. 나무가 굵고 클수록 더욱 많은 잎이며 한결 탐스러운 꽃들을 피우고, 더욱 튼실한 열매를 맺는다.

나무들은 언제나 자라고 있다. 큰 나무든 작은 나무든, 연륜이 깊은 나무든 얕은 나무든, 날마다 자라고 해마다 커나간다. 해마다 다른 꽃을 피워내고 새로운 잎을 펼쳐낸다. 나무는 해가 묵을수록, 많은 나이테를 그릴수록 점점 더 기품이 있고 늠름해 보인다. 나무는 죽을지언정 늙지 않는다.

나무들이 우거진 숲속에 서서 나를 본다. 나는 지금 큰 나무인가, 작은 나무인가, 얼마나 깊은 연륜이 깃들인 나무인가. 나는 날마다 해마다 무엇을 해왔는가. 내 몸의 자람은 멈추어버린 지 오래, 지금은 시나브로 노쇠를 향해 가고 있을 뿐이다. 부푼 꿈과 왕성한 기력으로 생애의 업에 매진했던 날들도 세월의 심연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뒷전 노옹이 되어 있다.

저 나무는 세월을 쌓을수록 더욱 푸른 잎과 튼실한 열매로 기품을 더해 가는데, 내 육신은 나이테를 더해가는 만큼이나 모든 것들이 자꾸 빠져나가 쇠하고 흉한 몰골이 되어간다. 머잖아 세상의 빛을 벗고 광막한 어둠에 잠기고 말 것이다.

죽음이야 모든 목숨 있는 것들이면 기꺼이 맞이해야 할 것이겠지만, 나무처럼 죽을지언정 늘 성장하며 늙지 않을 수는 없을까. 사람의 육신이란 나무와 달라 성장기를 지나면 날로 사위어 간다 하더라도, 나무가 갖지 못한 심령의 세계만은 푸름을 지킬 수는 없을까. 날마다 해마다 새로운 잎과 꽃을 피울 수는 없을까. 어찌해야 하랴, 어떻게 살아야 하랴.

고대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시(Gilgamesh)가 불사신 우투나피슈팀을 찾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별것 없다. 네 고향으로 돌아가 뜻있는 일을 하고, 친구들하고 맛있는 것 먹고, 아름다운 여인하고 사랑을 나눠라."고 하더란다. 이 말을 듣고 고향 우루크로 돌아간 길가메시는 마침내 백성의 왕이자 목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영웅의 삶은 아무나 살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나무처럼 푸르게 살다가 고즈넉이 떠날 수 있기를 바라고 싶다. 내 육신이 언제나 푸르기만 하는 나무가 될 수 없다면 우투나피슈팀의 가르침을 다시 새겨볼 일이다.

나는 지금 고향 삼을만한 정겨운 곳을 찾아와 살고 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뜻있는 일을 하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좋은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일일 것 같다. 어찌 쉽게 해낼 수 있는 일들이랴만, 세상이 내 명을 허여하는 날까지 가슴속 명문으로 깊이 갊아 두기라도 할 일이다.

산을 내려온다. 죽을지언정 늙지 않는 나무들을 다시 바라보며, 고운 노을빛이 어깨 위에 내려앉는 해거름 산길을 내린다. 친구가 있고 사랑할 사람이 있는 마을로 든다.(2015.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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