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강둑길 콘크리트

이청산 2015. 5. 10. 20:55

강둑길 콘크리트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여느 날처럼 아침 산책길을 나섰다. 두렁길을 거쳐 마을 숲을 지나 강둑으로 오르려는 순간, 둔탁하고 요란한 기계음이 강둑을 거칠게 파헤치고 있었다. 커다란 굴삭기가 강둑길의 한 자락을 사정없이 긁어댔다.

마을 고샅이며 들길들이 모두 아스팔트며 콘크리트로 덮여 있어도 강둑만은 아직 흙길이었다. 흙과 자갈이 깔린 강둑길에는 벚나무가 서 있어 봄이면 해사하고 화려한 꽃 천지를 이루고 양쪽 길섶이며 기슭에는 푸나무들이 자욱한 풀숲을 이룬다. 그 숲에서는 철 맞추어 피어난 온갖 풀꽃들이 한껏 정취를 돋운다.

강둑의 봄은 파란 하늘빛을 닮은 조그만 봄까치꽃과 노란색 산괴불주머니로부터 시작된다. 봄이 익어가면서 애기똥풀꽃, 미나리냉이꽃, 제비꽃, 조뱅이꽃 들이 수줍게 돋고, 날이 조금씩 더워진다 싶으면 하얀 개망초가 자욱이 피고, 노란 금계국이며 달맞이꽃이 강둑을 수놓는다. 갈퀴꽃, 무릇꽃, 익모초꽃, 이질풀꽃, 미국나팔꽃이 얼굴을 내민다 싶으면 여름이 한창 달아오를 때다.

계절의 유전을 따라 분홍빛 나도송이풀꽃이며 주황빛 유홍초, 남빛 닭의장풀이 어울려 가을을 부른다. 강둑의 가을은 또 한 판 꽃 잔치를 벌인다. 메꽃이며 물봉선, 알며느리밥풀꽃, 가을이 깊어간다 싶으면 쑥부쟁이, 구절초, 감국, 산국 들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피어난다. 여름부터 우거지기 시작한 갈대는 가을 지나면서 은화를 반짝이다가 그 꽃이 바람에 다 흩날려도 그대로 서있다가 겨울 강둑 설경 속에서 다시 한 번 은화를 피워낸다.

피고 지는 꽃들을 따라 수풀 무성히 우거진 아침 강둑을 걷노라면 풀잎에 내려앉은 이슬이며 서리가 발과 바짓가랑이를 흠뻑 적시기도 한다. 어떨 때는 바짓가랑이를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할 때도 있고, 도깨비풀 씨가 온몸에 달라붙기도 한다. 그런 강둑을 걷기가 성가실 때도 있지만 철 따라 바람 따라 피고지면서 정취를 돋우어 주는 꽃들을 생각하면 발걸음을 잡는 수풀이 오히려 귀하고 생광스럽게까지 하다.

그 재미를 찾아 아침마다 강둑을 걷는다. 맑게 흐르는 강물이며 온갖 풀꽃들과 눈을 맞추며 걷는 나의 강둑길 산책은 내 일상의 긴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하루도 그 강둑을 걷지 아니하면 아주 종요로운 것을 문득 잃은 것 같아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다.

, 그 풀꽃의 아름다움과 그 길의 긴요함은 나만의 부질없는 느낌이요 생각이던가. 허황한 꿈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았던가. 마을사람들은 그 길을 닦아 포장을 해 달라며 관에 진정을 했다. 그 걸 바라기는 바로 강둑 아래에 사는 사람이 유달리 더했다. 경운기도 다니고 차도 다녀야하고, 걷기에도 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운기며 차가 꼭 강둑길을 다녀야 하는가, 풀꽃이 발길을 좀 잡는 것이 그리 불편한가, 라는 나의 말은 그들에게는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물색없는 사람의 공허한 넋두리일 뿐이었다. 강둑의 꽃이 짓뭉개지는 것은 내 가슴이 뭉개지는 것과 같다는 말은 한갓 잠꼬대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한촌의 마지막 흙길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한촌에도 흙길이 귀하다. 논두렁 밭두렁 두렁길 말고는 길이란 모두 포장길이다. 생명의 기운이 솟아나올 것도 같은 흙을 밟으며, 포근한 풀잎에 아늑히 발을 담그며 걷는 즐거움을 사람들은 왜 모를까. 그마저도 물정 모르는 치기라 생각할지 모른다.

내 안타까움에 아랑곳없이 공사는 진행되어 갔다. 긁어낸 강둑길 양쪽 길섶으로 각목에 합판을 붙여 받침대를 설치하더니 철망을 깔고 회반죽 차가 달려와 양회반죽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강둑길에 쏟아져 쌓이는 반죽을 기다란 철판으로 죽죽 밀었다. 강둑은 양회 더미로 무참히 덮여나갔다.

며칠 후면 반죽은 편편하고 단단한 돌덩이, 바윗덩어리로 굳어질 것이다. 이제 비가 쏟아져도 물이 고일 일도 질퍽거릴 일도 없고, 얼기설기 돋은 풀이 발길을 막을 일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며 경운기며 자동차는 저 위를 편하다며 걷고 달릴 것이다.

한촌이 문명을 얻은 편리화일까. 한촌이 한촌을 잃은 도시화일까. 저 편리를 바라보는 내 가슴은 왜 이리 편하지를 못한가. 저 아래 깔린 흙들은 이제 영원히 하늘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풀도 꽃도 영영 품어내지 못할 것이다. 마치 내 가슴이 온통 양회반죽으로 덮여버린 것 같다. 그 반죽이 서서히 굳어져간다. 가슴이 조이면서 숨이 막혀온다.

함초롬히 피어 어여쁜 눈길을 주던 풀꽃은 어찌해야 할까. 발바닥에 와 닿던 흙의 생생한 감촉은 어이해야 할까. 꽃의 정겨운 눈길도, 흙의 산 기운도 느낄 수 없는 저 딱딱한 것 위를 아침마다 걸을 일을 생각하면 굳어져가는 양회처럼 내 발이며 다리가 나무토막처럼 쇠막대처럼 굳는 것 같다. 콘크리트에 덮인 강둑만큼이나 내 한촌 살이 한 자락에 무슨 반란이라도 일어난 것 같다. 침노라도 당한 것 같다.

어찌하랴, 온 사람들이 좋다는 걸 홀로 어찌 몽니를 부리랴. 마을사람 되어 살고 있음에야 저 단단한 길을 타박타박 걸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풀이며 흙에 대한 그리움은 어찌하랴. 콘크리트 길섶에도 풀은 돋고 꽃은 피겠지. 그 안쓰럽게 돋는 풀이며 꽃으로나 아린 마음을 달래야 할까.

강둑 자락이 전부 콘크리트로 덮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예산만큼 일을 하는 탓에 아직도 길의 많은 자락에 풀과 꽃이 남아있다. 언젠가는 다 덮여버릴지도 모르지만 우선은 덮인 자락만 안타까워하면 될 것이겠다. 그만큼만 아파하면 될 것이겠다.

그 예산이라는 이기가 더는 이 강둑을 덮지 않기를, 남은 강둑에라도 풀과 꽃이 온전히 피어날 수 있기를, 언제까지나 그 풀과 꽃을 보면서 걸을 수 있기를-! 몰래 숨겨놓은 이 비원을 천연히 흐르는 저 강물이 알까? 물 위를 나는 저 새가 알까?(20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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