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베어진 살구나무

이청산 2013. 12. 9. 09:35

베어진 살구나무
-청우헌일기·32

 

우리 동네가 참 좋다. 형아 아우야 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좋지만, 동네를 싸고 있는 사철 다 달리 피고 지는 경치도 이를 데 없이 좋다. 좋은 경치 속을 사니까 사람들이 좋은지도 모른다.

봄에는 강둑을 화려하게 수놓는 벚꽃 행렬이며, 붉고 희고 노란 꽃들이 향연을 벌이는 산 경치, 그 경치가 여름이면 초록의 싱그러운 풍경이 되고, 가을이면 노랗고 붉은 단풍 천지를 이루고, 겨울에는 부시게 하얀 눈꽃이 비경을 펼쳐낸다.

산과 나무가 있는 곳이면 어딘들 그러하지 않으랴만, 경치의 아름답기는 모든 곳이 같을 수는 없다. 우리 동네는 철철이 설레게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지는 곳이다.

강둑이며 산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 크지 않은 동네지만 집집이 여름이면 브로치 같은 노란 꽃, 가을이면 전등 같은 붉은 열매를 다는 감나무는 거의 다 있고, 산수유며 앵두, 매화, 라일락으로 마당을 가꾼 집도 있고, 늘 푸른 대나무며 기품 어린 능소화로 담장을 꾸민 집도 있다. 이 모든 나무며 꽃들이 어울려 마을은 늘 화원이다.

그 중에서도 봄이면 이 꽃동네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동네 가운데 어느 이웃 마당귀에 서 있는 오래된 살구나무다. 삼월 들면서 맺히기 시작하는 붉은 봉오리가 사월이 들면서 터지기 시작하여 봄 한철 꽃으로, 꽃비로 마을을 치장한다

 수령이 사오십 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나무는 꽃도 화사하게 피어나지만, 열매도 토실하게 맺어 시큼 달큼한 살구를 탐스럽게 달고 있다가 툭툭 떨어뜨리기도 한다. 어느 시인은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고 했던가. 동네에 오래된 살구나무가 하나 있어 봄을 더욱 정겹고 살갑게 했다.

살구나무에 꽃 피고 지던 봄이 가고, 무성한 잎들로 그늘 짓던 여름도 지나고, 붉은 잎이 낙엽 되어 내려앉던 가을도 꼬리를 거두어가던 겨울 초입의 어느 날, 정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살구나무가 사라졌다. 그 크고 오래된 나무가 홀연히 베어져나갔다. 그 나무는 토막토막 잘라져 어느 집 가마솥 아궁이 앞에 쌓여져 있었다.

아궁이 주인이 말했다. 낙엽이 길을 어지럽히는 것도 수선스럽고, 봄에 살구가 떨어져 발에 밟히는 것도 성가셔서 마당귀 주인과 의논하여 베었다는 것이다. 나무가 여물어서 베는 데 애를 먹었다며, 그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는 마음으로 그 나무를 베어낼 수가 있었을까. 살구꽃 핀 마을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라 했던 시구는 떠올리지 못했을지언정, 봄을 더욱 봄답게 하던 그 아리따운 꽃은 생각나지 않았을까?

마당귀 주인에게도, 아궁이 주인에게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곡진한 사정이 없고서야 어찌 쉽사리 베어낼 생각을 했을까. 아린 마음을 달래보지만 둥치가 잘려나간 그루터기를 보노라면 스산한 바람결이 허공을 돌고 있는 듯하다.

생애의 두그루부치기를 위해 이 한촌으로 와서 몇 해를 지나면서 정겨운 풍경이며 살가운 인심에 깊숙이 들여놓아 가던 마음의 걸음, 그 발바닥이 아릿하게 저려 온다. 올 봄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 베어져 나간 살구나무의 그루터기를 어떻게 보고 지나야할까.

, 설상가상의 소문이 동네를 돈다. 꽃으로 단풍으로 그야말로 울긋불긋 꽃 대궐을 이루는 동네 뒷산에 머잖아 산판이 벌어질지도 모른단다. 객지에 나가있는 산주 문중이 목상들과 의논 중이란다. 산 풍경이 장차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 남의 권리 행사를 어찌 참견할 수 있으랴만, 거저 풍문으로 흘러가는 말들이기를 안타깝게 바랄 뿐이다.

사람 좋고 경치 좋은 이 한촌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곳만은 아니런가. 희로애락이 있는 세상살이의 한 세속일 뿐이런가. 이해의 타산 앞에서는 아름다운 풍경도 물러앉아야 하는 속절없는 곳이런가.

그래도 우리 동네가 참 좋다. 살구나무는 없어져도 아름다운 시 하나 동네 풍경 속 어딘가에 걸려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은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이호우 : ‘살구꽃 핀 마을

 

해거름이면 어디에서 술 잘 익었다며 한 잔 하자는 전갈이 올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호박전을 부쳐갈까, 정구지전을 부쳐갈까 하는 작은 갈등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네 누구네 집에서는 무슨 일을 잘 하고 무엇을 잘 갈무리하고 지낸다는 사소한 이야기들을 사소하지 않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201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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